청조만담[제9화] 학급일지(3)

2024-12-04
조회수 72

64년 9월 30일, 하복 마지막 입던 날 

"에에, 오늘은 '영어 에이슈(Ace)'는 놔두고 리라이팅구(rewriting) 하겠슴다" 연신 에헴, 에템 잔 기침을 해가며 책을 눈높이에 바짝 갖다 대고 학생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듣거나 말거나 수업을 진행하는 희한한(?) 영어 문법 선생이었다. 이창규라는 이 선생은 뒤에 다시 언급할 일이 있겠지만 실력은 둘째 치고 우리말이든 영어든 지독한 일본식 발음을 하는 지라 알아듣기 힘들어 학생들로부터 극찬을 받거나 아니면 형편없는 혹평을 받던 선생이었다. 과목 자체가 재미없는 영문법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강의를 하도 '혼자서만' 열심히 하는 바람에 웬만큼 정신 차리지 않으면 졸음이 절로 왔다. 배우고 안 배우고는 너회들 책임이지 내 알 바 아니라는 간 큰 선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이 구월 마지막 날, 이 지루한 과목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자마자 바로 학생들 간에 대소동이 벌어졌다. 선생이 미처 교실 문을 나가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툭툭 바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이 쑥색 하복을 마지막 입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검정색 '사-지' 동복을 입기 때문에 다시는 하복을 입을 수 없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바지를 세로로 죽 죽 찢는 놈. 한쪽 다리 통을 잘라내는 놈, 양쪽 무르팍을 요절내는 놈, 가랑이를 툭 타서 팬티를 비죽이 내밀고 다니는 놈, 흰 광목천으로 된 남방 셔츠를 단추째 타버리는 놈, 가지각색이었다.  

●삽화 - 박세형(24회)                                         


요새 젊은이들이 일부러 청바지 무르팍을 뻥 뚫리게 파내거나 재봉선을 타내려 실밥이 질질 흘러내리게 하여 입고 다니는 꼴을 보는데, 우리는 벌써 40년 전에 경험한 일이다.

이 날 바지를 절단 낸 학생 수는 5반만 무려 19명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다.

마침 우리 반 앞을 지나가던 수학 담당 정진헌 선생이 이 꼴을 보고 탄식하여 가라사대,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이거 이라모 안됩니다. 이거." 오만상을 찌푸리고 내뱉는 이 말에 우리는 다시 한번 폭소를 터뜨렸다. 그 뻔쩍거리는 대머리에 목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작달막한 키에 고개를 잘래 잘래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64년 10월 X일, 올림픽이 유죄

당시 시청각실이라는 게 있었다. 여기는 첨단 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학생들에게는 늘 선망의 대상이던 곳. 교내 방송 시설은 물론 TV 등이 있는 이 곳은 시청각반 이외에는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던 때라 들어가기가 서울대학 문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5반 악동들에게 그깟 출입 통제가 무슨 대수랴. 마침 그 때 열리고 있던 올림픽 TV중계가 보고 싶어 안달이던 학생들은 특공대를 조직, 교실을 오가며 올림픽 경기 상황을 생중계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정보를 입수한 우리의 결사대 현기섭 군 외 2명은 마침내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하여 시청각실을 점령하였다. 한편으로 TV를 보면서 한편으로 교실을 오가며 신나게 중계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시청각 주임 교사가 긴급 출동했다. 급한 김에 도망치다 현군은 차고 있던 손목시계가 박살나 손해액이 무려 154원이나 발생하였고, 무단 시설물 침입 및 동 이용죄로 결사대는 모조리 체포되고 TV 중계는 중도에 무산되고 말았다. 잡혀가면서 현군이 탄식하며 하는 말, "올림픽이 유죄지 내가 무슨 죄냐? 누구는 달리기하고 메달도 타는데 나는 달리기하다 무릎 까지고 시계 박살나고“

 

64년 10월 X일, 교정에 울려 퍼진 유행가

또 하나 시청각실에서 일어난 해프닝, 요새 케이블 방송에서 가끔 관계인의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지만 멀쩡한 가정집에 포르노가 방송되어 소동을 빚는 일을 종종 본다. 우리 시절에 포르노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고, 바늘 침의 유성기로 LP 판을 듣는 것이 최대의 문화적 사치였다. 그래서 음악에 포원이 진 몇 놈들이 시청각 반장 이원태 군(전 동국산업 상무)을 꼬셔 점심시간에 시청각실에 들어가 저들끼리만 듣는다고 살짝 고상한(?) 음악을 틀었다. 그때의 고상한 유행가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불란서의 상송 '시노메 모로', 미국의 팝송 '유 민 에브리싱 투 미', '아이 캔 스탑 러빙유' 등이었다. 그 감미로운 노래에 환장한 이 친구들이 오프라인인 줄 알고 이러한 명곡(?)들을 틀었는데 이것이 그만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방송되고 만 것이다. 때 아닌 유행가가 온 교정에, 온 교실에 울려 퍼졌으니 그 광경을 상상해 보라, 히히호호 박수를 치고 소동이 일어났다. 당장 교무실에서 난리가 나고, 친구들은 도망가고, 시청각실에는 DJ도 없이 레코드만 돌아가고 있었다. 덕택에 삭막한 교정에 봄 바람이 불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것이 놈들의 실수였다고 믿지 않는다.

 

64년 10월 8일, 교내 백일장에서 일어난 일

내일이 한글날이라 당시 시인 겸 국어 교사이던 안장현 문예반 선생의 주관 하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교내 시 백일장이 열렸다. 3학년의 제목은 '가을' 이었다. 전교생은 모두 한 편씩 써내게 되어 있어 나도 무어라고 써내었는데 그것이 3등으로 입상되어 급우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이 작품은 당시 교지인 '청조'에 실려 있음) 1등(장원)은 1학년 추(秋)모군이라고 했는데 정작 시상식 때는 당선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타지 발표작의 표절이라는 것이었다. 이 해프닝은 다른 반의 전득만군이 직접 관련자인데, 무려 35년만에 그 전말을 털어놓은 그의 고백적 수기(?)가 '청조인' 지(99.7)에 실려있어 그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미술실! 당시 공인된 흡연실이며, 선택과목시간에는 사이비 미대지원자가 모여 득실거리던 곳, 백일장이 있던 그날 나는 전년도 인근 타지 교우지(校友誌)를 베개삼아 누워 또 다른 교우지를 읽고 있었고, 시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몇몇이 모여 손이 탈세라 꽁초를 빨고 있었다. 시간이 좁 지나자 미술반원도 모여들고 있었고 우리 동기들도 모여들어, 대학입시공부 하고 상관없는 '시 쓰는일'에 황당함을 털어놓고 있었을 때, 우리의 실패한 역모사건의 대상자인 교장 선생님의 손자이자 미술반 1학년인 추0O가 원고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걸 보고 "시제가 뭐꼬?" 물었더니 " '고향' 입니더."라고 했다.

"그라문 이거 베껴 쓰라." 

장원하면 상금 갈라먹기로 하고 내민 것은 내가 보고 있던 우리의 이웃 경남여고의 교우지였다. (제목: '가을', 부제 고향에 부쳐, 작자는 현재 부산의 모여대 교수 · 시인으로 활동중임) 교장 선생님의 손자는 아무 생각 없이 자구하나 틀리지 않게 (표절이 아니라는 의미로) 송두리째 베껴 제출해 버렸다. 그가 가버린 후 펄쳐놓은 그 시를 다시 꼼꼼히 읽다가 아차 싶있다. 여고생의 감수성 깊은 시심은 내가 읽어도 장원감이었다. 그런데, 그 작품이 실제로 심사에서 장원으로 결정되고 교장선생님이 자기의 손자가 장원하였다고 기뻐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시상식 직전에 이실직고하여… 아침조회 운동장 스피커에서 발표된 내용은 장원은 없고, 차상에… 라고발표되었다.

그날 나는 오전 4시간 내내 교무실 안(安)선생님 의자 옆에 끓어앉아 심심하면 얻어맞았다. 맞고 또 맞고, 수업 들어가 있다 나와서는 또 패고, 나중에는 인간이 되라고 책을 한 권 주였는데 그 책은 그날 당장 고관 헌 책방에 팔아버렸다.」


전득만군은 장난 삼아 했다고 하나 장난치고는 좀 심했다. 어쨌든 그것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안장현 선생님은 아직 서울에 생존해 계시니 한번 찾아볼 일이다. 그날 나와 함께 지은 우리 반 골초 권영재 군의 등외 시 한편이 기억나는데 그 내용이 천하 명작이라 소개한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나는 예비고/ 남은 삼개월」


촌철살인! 잔망스럽게 길게 쓸 거 뭐 있나. 천고마비 계절에 계집애 엉덩이는 탐스럽게 살이 찌는데 나는 안 되는 공부하느라 갈수록 야위고, 이제 졸업은 3개월밖에 안 남았으니 얼마나 불안 초조하랴, 이 시를 보니 그가 담배골초가 된 이유를 알겠다.

<2025. 1월 호에 계속>



0 0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