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에 걸린 선생님들
지금은 시월 상달,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고3 졸업반은 비루먹은 몸에 눈만 살아서 들고양이처럼 빛난다. 이제 남은 3개월, 공부는 더 할 것도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럴 때는 담배가 약이다. 공부는 공부고 담배는 담배다. 어른들은 초조할 때 뭐 하십니까. 우리는 담배 말고 다른 것은 절대로 안 합니다. 마, 더 녹을 빼도 없슴다.
이제 학생들은 노골적이었다. 담배 정도는 교실에서 그냥 피워댔다. 뒷줄에 앉은 놈들은 시간 중에도 그단새를 못 참고 창문을 빼꼼이 열어놓고 담배를 피워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데 제발 다 아는 빠이롱 고만 시룹시더… 이런 판이니 선생님들도 함부로 학생들을 대하지 못하였다.
그 엄하던 훈육선생님은 사고를 우려하여(?) 현명하게도 졸업반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았고, 유수현 담임 선생도 고작 한다는 말이 "담배는 가급적 집에서 해결하도록." 애걸할 정도였다. 자고로 레임덕 현상은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그래도 학생으로서 지킬 일이나 학교에서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따랐다. 일례로 마침 열리고 있던 인근 경남여고 미전(美展)에 학교명의로 기증하려고 누구든 좋은 그림 있는 자는 가지고 오라 했는데, 그 말 잘 안 듣는 "영고이 정고이…" 7인방 중의 뺀질이 규환이가 명화 한 점을 가져왔다.
그림 제목은 '납세미'. 제목을 듣는 순간 갑자기 그림에서 암내가 났다. 여고에 맛조개도 아니고 납세미라, 거 참 요샛말로 "재섭서, 재섭서" 하면서도 눈을 빛내던 고이연 놈들, 그 눈빛들이 그립다.
율 부린너, 구봉산에 출현하다
앞서 잠깐 언급한 우리의 기차통학생 박순백이 드디어 영웅본색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는 맘보바지를 입고도 교무실에 불려가지도 않았고 머리를 빡빡 밀어 백고를 쳐도(그래서 얻은 별명이 율 부린너) 아무도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천하의 율 부린너, '왕과 나'를 누가 감히 건드리랴. 말년에 순백이는 실로 용감하였다. 그가 불렀던 18번 노래 중 4분의 3박자로 된 육자배기 시리즈가 있다. 그 중 하나인 '기동부대의 노래'를 들어보자. (각자가 박자를 붙여 큰 소리로 부를 것)
회망 실은 통근차 차장이 없어 못 가는데
"서면 가요" 가시내 목구멍 째애질라
삐빠빠룰라 시스마이 베비야 /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가보자
작년에 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있다 없다 말 말고 살기가 좋다 밥 한 술
영도다리 건너올 때 누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노
니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싹싹 쑤셨지
앞에 가던 가시내 빵구를 끼니 / 냄새 맡은 개구리 하품을 한다
이십세 청년이면 징병에 해당자
장개 갔던 첫날밤에 소집영장 웬 말이냐
乃早知 瑟琴 欲報至 恩德 / 뚱뚱이 흘쭉이 논산훈련소로 가다
정월이라 대보름 달 밝은 밤에
부부간에 사바사바하다 궁디 헤어진 데 뱀다야찡
대가리에 혹이 나면 망치로 뚝딱 / 옆구리에 혹이 나면 대패로 쓱싹
엉덩이에 뿔이 나면 톱으로 싹뚝 / 가랭이에 천막 치면 손으로 빡빡
이 가사는 끝이 없는데 매일매일 부를 때마다 가사 내용이 달랐다. 그 자유자재한 애드립은 요새 뒤늦게 유행하는 젊은이들이 재잘거리는 랩송 저리 가라다. 이런 노래를 40년 전에 부르고 즐긴 우리들은 얼마나 앞선 세대들인가. 존경해주기 바란다. 이 박순백이는 작은 키에 되바라진 눈을 하고 남을 잘도 웃겼는데 심심하면 오락시간을 만들어 온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다. 재담도 잘하고 노래도 어디서 배워오는지 레파토리가 무궁무진했는데 당시 막 나온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불러 인기절찬이었다. 그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하고 목을 기우뚱 빼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두 손을 비비꼬며 노래 부르면 우리는 가사를 받아 적느라 바빴고. 그 가사를 수학 공식보다 더 먼저 외우기에 바빴다.
수업과 수업의 막간 10분 휴식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그의 독무대였다. 간간이 7인방 중 쇠대기(=끼어들기) 전문인 상욱이(작고)가 '꼴리나 꼴리나' 나 I can't stop loving you'를 부르며 찬조 출연을 했지만 모든 흥행의 제작 감독 주연은 그의 몫이었다. 밑천이 달리면 지나가는 하급생들을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 나오는 흑인 노예 헌팅하듯이 다짜고짜로 잡아 들여 교단 위에 세우고 노래를 시켰다. 시킨 노래를 들었으면 되었지 끝나도 그냥 보내지 않고 잘하면 잘한다고 "이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유행가만 배웠나" 하고 때리고, 못하면 못한다고 "대 부고에 들어온 놈이 학교 망신시키려고 노래도 하나 못하나" 하고 때리고, 하여튼 못 말리는 종내기였다. 한번은 수업 종이 울려 선생님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원맨쇼를 하다가 이를 지켜보던 선생님도 기가 차서 웃고 말았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두 다시 올 수 없는 그리운 추억들이다. 아. Those were the days!'여 …. 어쨌든 그 리틀 율 부린너 순백이는 2학기에 들어와 제일의 기쁨조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우리의 찌들은 입시고를 풀어준 그의 노고를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치하한다.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진기 명기 백출한 교내 체육대회
上善若水(상선약수)가 아니라 上善若工夫라! 老子는 놀라고 했는데 공부를 제일의 선(善)으로 치는 부산고에서 체육대회를 연다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그런데, 우리 때에는 그것이 있었다.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지금도 동기생을 만나면 술자리에서 당시 교내 행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슬쩍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체육대회였다고 답하는 것을 본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추억제조공장이었던가. 많은 에피소드와 추억 거리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개인별, 반별 대항 경기, 특활부별 대항, 학년 대항 등등…
5반의 경우를 보자. 맨 먼저 반별 달리기에서 반의 명예를 걸고 반장 김장섭이 나섰다. 덩치는 우람했지만 달리기가 어디 덩치나 성질만으로 되는 것인가. 그는 급한 김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비켜라, 아베베!"를 외치며 맨발로 뛰었으나 별무 신통. 그가 몇 등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때 맨발 벗고 뛴 놈은 그놈 뿐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사금파리에 찍힌 발을 안고 식식거리던 그때 그 모습.
이어 반별 대항 릴레이에서 7인방의 뒷북치기 전문 이승화는 그 육중한 가분수의 몸을 이끌고 앞선 주자들이 혼신의 힘으로 확보해 놓은 일등 자리를 이어 받아 달리다가 꼴인 직전에 그만 넘어져서… 꼴찌를 했다. 참, 재수가 없는 것은 그가 아니라 우리 5반이었다. 그놈의 승화만 아니었다면, 그놈의 돌멩이만 없었더라면 하는데 갑자기 저쪽 테이블에서 꽝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한이 아직도 안 풀린 놈이 내리친 주먹이었다. 아, 40년의 세월도 못 풀어준 한이여!
개인별 경기에서 노재철(의사)이는 200미터 달리기에 나가 결승전에서 1등을 확인함과 동시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고, 여영수(통일교 비서실장)는 달리기에서 생애 처음으로 2위를 하였다.
정순길(WTT 소장)이는 장애물 달리기에서 난생 처음 3위를 하여 그 학다리를 쳐들고 기고만장하였다. 박경상이도 200미터 달리기에 나가 생애 처음으로 조 1등을 하고 그 감격을 시로 읊었다.
"낙엽이 창문가에 떨어진다 / 아, 나도 막 떨어진다 / 자꾸만 떨어진다. 또, 또…"
분명 나가는 논조로 보아 시는 시 같은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도대체 달리기에서 1등 한 것과 낙엽 지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또, 10,0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한 천익정(천지산업 전무)이는 등수에 들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 그 때 공부에 미쳐 핼쑥한 얼굴로 종종 내게 장난 꿀밤을 먹던 (내 앞자리에 앉은 죄로) 그에게 "니 그 몸으로 될 끼라고 나갔더나?" 하고 내가 물었더니, "내 의지를 한분 테스트해 볼라꼬 안 그랬나…" 아. 여기 또 하나 별종이 있었구나. 그 때 완주한 의지 탓인지 IMF를 겪고도 그 나이에 잘리지 않고 목하 왕성하게 현업을 달리고 있는 그를 보면 어째 그 비밀의 한 부분을 알 것도 같다.
<2025. 2월 호에 계속>
레임덕에 걸린 선생님들
지금은 시월 상달,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데 고3 졸업반은 비루먹은 몸에 눈만 살아서 들고양이처럼 빛난다. 이제 남은 3개월, 공부는 더 할 것도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럴 때는 담배가 약이다. 공부는 공부고 담배는 담배다. 어른들은 초조할 때 뭐 하십니까. 우리는 담배 말고 다른 것은 절대로 안 합니다. 마, 더 녹을 빼도 없슴다.
이제 학생들은 노골적이었다. 담배 정도는 교실에서 그냥 피워댔다. 뒷줄에 앉은 놈들은 시간 중에도 그단새를 못 참고 창문을 빼꼼이 열어놓고 담배를 피워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데 제발 다 아는 빠이롱 고만 시룹시더… 이런 판이니 선생님들도 함부로 학생들을 대하지 못하였다.
그 엄하던 훈육선생님은 사고를 우려하여(?) 현명하게도 졸업반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았고, 유수현 담임 선생도 고작 한다는 말이 "담배는 가급적 집에서 해결하도록." 애걸할 정도였다. 자고로 레임덕 현상은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그래도 학생으로서 지킬 일이나 학교에서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따랐다. 일례로 마침 열리고 있던 인근 경남여고 미전(美展)에 학교명의로 기증하려고 누구든 좋은 그림 있는 자는 가지고 오라 했는데, 그 말 잘 안 듣는 "영고이 정고이…" 7인방 중의 뺀질이 규환이가 명화 한 점을 가져왔다.
그림 제목은 '납세미'. 제목을 듣는 순간 갑자기 그림에서 암내가 났다. 여고에 맛조개도 아니고 납세미라, 거 참 요샛말로 "재섭서, 재섭서" 하면서도 눈을 빛내던 고이연 놈들, 그 눈빛들이 그립다.
율 부린너, 구봉산에 출현하다
앞서 잠깐 언급한 우리의 기차통학생 박순백이 드디어 영웅본색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는 맘보바지를 입고도 교무실에 불려가지도 않았고 머리를 빡빡 밀어 백고를 쳐도(그래서 얻은 별명이 율 부린너) 아무도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천하의 율 부린너, '왕과 나'를 누가 감히 건드리랴. 말년에 순백이는 실로 용감하였다. 그가 불렀던 18번 노래 중 4분의 3박자로 된 육자배기 시리즈가 있다. 그 중 하나인 '기동부대의 노래'를 들어보자. (각자가 박자를 붙여 큰 소리로 부를 것)
회망 실은 통근차 차장이 없어 못 가는데
"서면 가요" 가시내 목구멍 째애질라
삐빠빠룰라 시스마이 베비야 /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가보자
작년에 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있다 없다 말 말고 살기가 좋다 밥 한 술
영도다리 건너올 때 누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노
니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싹싹 쑤셨지
앞에 가던 가시내 빵구를 끼니 / 냄새 맡은 개구리 하품을 한다
이십세 청년이면 징병에 해당자
장개 갔던 첫날밤에 소집영장 웬 말이냐
乃早知 瑟琴 欲報至 恩德 / 뚱뚱이 흘쭉이 논산훈련소로 가다
정월이라 대보름 달 밝은 밤에
부부간에 사바사바하다 궁디 헤어진 데 뱀다야찡
대가리에 혹이 나면 망치로 뚝딱 / 옆구리에 혹이 나면 대패로 쓱싹
엉덩이에 뿔이 나면 톱으로 싹뚝 / 가랭이에 천막 치면 손으로 빡빡
이 가사는 끝이 없는데 매일매일 부를 때마다 가사 내용이 달랐다. 그 자유자재한 애드립은 요새 뒤늦게 유행하는 젊은이들이 재잘거리는 랩송 저리 가라다. 이런 노래를 40년 전에 부르고 즐긴 우리들은 얼마나 앞선 세대들인가. 존경해주기 바란다. 이 박순백이는 작은 키에 되바라진 눈을 하고 남을 잘도 웃겼는데 심심하면 오락시간을 만들어 온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다. 재담도 잘하고 노래도 어디서 배워오는지 레파토리가 무궁무진했는데 당시 막 나온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불러 인기절찬이었다. 그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하고 목을 기우뚱 빼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두 손을 비비꼬며 노래 부르면 우리는 가사를 받아 적느라 바빴고. 그 가사를 수학 공식보다 더 먼저 외우기에 바빴다.
수업과 수업의 막간 10분 휴식 시간이나 점심시간은 그의 독무대였다. 간간이 7인방 중 쇠대기(=끼어들기) 전문인 상욱이(작고)가 '꼴리나 꼴리나' 나 I can't stop loving you'를 부르며 찬조 출연을 했지만 모든 흥행의 제작 감독 주연은 그의 몫이었다. 밑천이 달리면 지나가는 하급생들을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 나오는 흑인 노예 헌팅하듯이 다짜고짜로 잡아 들여 교단 위에 세우고 노래를 시켰다. 시킨 노래를 들었으면 되었지 끝나도 그냥 보내지 않고 잘하면 잘한다고 "이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유행가만 배웠나" 하고 때리고, 못하면 못한다고 "대 부고에 들어온 놈이 학교 망신시키려고 노래도 하나 못하나" 하고 때리고, 하여튼 못 말리는 종내기였다. 한번은 수업 종이 울려 선생님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원맨쇼를 하다가 이를 지켜보던 선생님도 기가 차서 웃고 말았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두 다시 올 수 없는 그리운 추억들이다. 아. Those were the days!'여 …. 어쨌든 그 리틀 율 부린너 순백이는 2학기에 들어와 제일의 기쁨조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우리의 찌들은 입시고를 풀어준 그의 노고를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치하한다.
진기 명기 백출한 교내 체육대회
上善若水(상선약수)가 아니라 上善若工夫라! 老子는 놀라고 했는데 공부를 제일의 선(善)으로 치는 부산고에서 체육대회를 연다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그런데, 우리 때에는 그것이 있었다.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지금도 동기생을 만나면 술자리에서 당시 교내 행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슬쩍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체육대회였다고 답하는 것을 본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추억제조공장이었던가. 많은 에피소드와 추억 거리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개인별, 반별 대항 경기, 특활부별 대항, 학년 대항 등등…
5반의 경우를 보자. 맨 먼저 반별 달리기에서 반의 명예를 걸고 반장 김장섭이 나섰다. 덩치는 우람했지만 달리기가 어디 덩치나 성질만으로 되는 것인가. 그는 급한 김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비켜라, 아베베!"를 외치며 맨발로 뛰었으나 별무 신통. 그가 몇 등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때 맨발 벗고 뛴 놈은 그놈 뿐이었던 것만 기억난다. 사금파리에 찍힌 발을 안고 식식거리던 그때 그 모습.
이어 반별 대항 릴레이에서 7인방의 뒷북치기 전문 이승화는 그 육중한 가분수의 몸을 이끌고 앞선 주자들이 혼신의 힘으로 확보해 놓은 일등 자리를 이어 받아 달리다가 꼴인 직전에 그만 넘어져서… 꼴찌를 했다. 참, 재수가 없는 것은 그가 아니라 우리 5반이었다. 그놈의 승화만 아니었다면, 그놈의 돌멩이만 없었더라면 하는데 갑자기 저쪽 테이블에서 꽝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한이 아직도 안 풀린 놈이 내리친 주먹이었다. 아, 40년의 세월도 못 풀어준 한이여!
개인별 경기에서 노재철(의사)이는 200미터 달리기에 나가 결승전에서 1등을 확인함과 동시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고, 여영수(통일교 비서실장)는 달리기에서 생애 처음으로 2위를 하였다.
정순길(WTT 소장)이는 장애물 달리기에서 난생 처음 3위를 하여 그 학다리를 쳐들고 기고만장하였다. 박경상이도 200미터 달리기에 나가 생애 처음으로 조 1등을 하고 그 감격을 시로 읊었다.
"낙엽이 창문가에 떨어진다 / 아, 나도 막 떨어진다 / 자꾸만 떨어진다. 또, 또…"
분명 나가는 논조로 보아 시는 시 같은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도대체 달리기에서 1등 한 것과 낙엽 지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또, 10,0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한 천익정(천지산업 전무)이는 등수에 들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 그 때 공부에 미쳐 핼쑥한 얼굴로 종종 내게 장난 꿀밤을 먹던 (내 앞자리에 앉은 죄로) 그에게 "니 그 몸으로 될 끼라고 나갔더나?" 하고 내가 물었더니, "내 의지를 한분 테스트해 볼라꼬 안 그랬나…" 아. 여기 또 하나 별종이 있었구나. 그 때 완주한 의지 탓인지 IMF를 겪고도 그 나이에 잘리지 않고 목하 왕성하게 현업을 달리고 있는 그를 보면 어째 그 비밀의 한 부분을 알 것도 같다.
<2025. 2월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