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에 말이지 찬수(申贊守)는 이미 오래 전에 걸레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십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옛 추억이 재미 있어서 그를 그냥 걸레라고 불렀고 사람 좋은 찬수는 그때마다 싱글벙글 웃으며 오냐, 오냐 그랬다. 그와 오래 동안 교분이 없는 동기들도 아마 '신찬수' 보다는 '신걸레' 라면 얼른 기억이 나리라.
고등학교 시절의 개차반 신찬수. 걸레도 그냥 걸레가 아니라 빨아도 빨아도 시어빠진 냄새가 나는 신걸레라면 "아, 그라이 알겄다" 그럴 것이다.
별명 그대로 고교 시절의 찬수는 아무도 못말리는 개차반,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문제 학생이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미처 일주일도 안되는 점심시간에 학교 담을 뛰어넘어 초량시장 끝에 있었던 한밭극장에 '자유부인 속편'을 보러갔다가 지도교사단에 걸려서 당시 훈육주임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P고교가 생긴 이래 입학 후 최단 시간에 무기정학을 기록한 놈"이 바로 걸레 신찬수다. 말도 마라.
그 후로도 별의별 못된 짓거리로 유기·무기정학을 밥 먹듯이 맞았는데 신기하게도 퇴학은 커녕 낙제 한번 안하고 졸업을 해서 일류는 아니지만 서울의 D대학 경영학과에 보란 듯이 처억 붙어서 사람들은 컨닝을 해서 들어갔다느니 그게 아니라 그 자슥이 공부 하나는 걸레로 안했다느니 참 말도 많았다.
그런데 그 걸레가 대학에 입학을 한 후에는 백팔십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무슨 쇼크를 받았든지 아니면 무슨 피 맺힌 결심을 했던 게 분명한데 대학 4년을 내리 장학생으로 졸업을 하고 재벌 종합상사에 들어가서 3년쯤 있더니 일찌감치 탈(脫) 월급장이를 선언하고 나서서 사십대 초반에 벌써 엄청난 규모의 생산공장을 갖추고 종업원이 오백명도 넘는 굴지의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또 하나 모를 일이 그 헌출한 용모에 죽을 때 까지 독신으로 지냈는데 암튼 그 걸레하고 나는 국민학교때부터 단짝이었다. 지금이야 대학교수로, 또한 사계(斯界)에서는 알아주는 소설가로 의젓하기 짝이 없지만 고백컨데 고교시절 나의 별명 역시 '준(準)걸레' 였고 기실 '한밭극장 사건'에 나도 공범이었다.
각설하고, 그 신걸레가 2~3년 전부터 시들시들하더니 마침내 폐암 말기라는 확진을 받고 꼼짝없이 대학병원에 누워 있는지도 벌써 6개월째. 본인도 이제는 가망이 없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고 드디어 담당 의사도 그의 주변 정리를 위해 길어야 이제 한달 쯤이라고 며칠 전에 조용히 최후통첩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도 나는 문병을 갔다. 간병을 해오던 제 누이동생으로부터 전화로 그런 사연을 들었던 터라 그날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병상 곁에 앉자마자 그가 먼저 기다렸다는듯이 입을 뗐다.
"마침 잘왔다. 니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스나 사건으로 내가 또 정학을 묵은 거 알제?"
이제 죽마고우한테 무슨 비장한 유언이라도 하는가 부다 했는데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린가 싶어 나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미친 놈. 죽을 때가 되어 실성을 했나. 고등학교때 걸레 니가 정학을 묵은기 어데 한두번이가?"
"앙이다. 니말 마따나 죽을 때도 됐고 오늘은 내 니 한테 꼭 이 사연은 털어놔야겠다."
"사연이라이, 무신?"
우리 나이를 지천명(知天命) 이라고 했다더니 걸레는 죽음을 선고받은 하루만인데도 그렇게 초연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안즉 와 결혼을 안했능가 하문 그때 그 순실이 때문인기라."
"머라꼬?"
"그라고, 그때 나는 정학이 아이라 퇴학을 당해야 했던 거라꼬."
"그거는 또 무신 소리고?"
아스라한 기억으로 찬수가 말하는 그때란 그가 교내외로 걸레라는 명성(?)이 한껏 드높았던 무렵 인근 K여고의 여학생을 한밤중에 무지막지하게 손찌검을해서 졸업을 두어달인가 앞두고 또 일주일 정학을 맞았던 사건이었다.
까닭인 즉슨 우리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양순실이란 그 여학생이 찬수더러 걸레라고 놀렸다는 건데 지금 생각해도 그가 정학을 맞았던 이유 치고는 가장 시시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때 사실은 순실이 하고 내 하고는 무지 무지하게 좋아했던 사인기라. 걸레를 걸레라 카지 그라믄 행주라 카겠나."
퀭한 그의 시선이 40년전 그때를 찾는 듯 창밖에 미동도 없이 박혀 있었고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기 학교 뒷산 수원지였고 그날 밤에 나는 일생일대의 고백을 했능기라. 대학교를 졸업하믄 내캉 살자꼬, 내 하고 결혼해서 평생 깨소곰 매로 살자꼬."
나는 그야말로 흥미진진이었다. 그때 찬수가 아무리 걸레같은 짓거리들을 하고 다녀도 여학생에 연루된 사건은 하나도 없었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이유가 설마 그 순실이란 여학생 때문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찬수의 시선은 그대로 창밖에 박혀 있었다.
"그랬는데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싫다 카능기라. 그때 나도 입시공부를 쪼매 해본다꼬 시간이 없어서 한 두어달 못만났는데 고새 고기 고렇게 변해 삐린줄은 누가 알았겠노? 변한 정도가 아니라 그때 머라켓는 줄 아나?"
"머라켓는데?"
"대학은 고사하고 인자 걸레짓이나 고만 하라는기라. 깨소곰은 놔두고 앞으로 세끼 밥이나 잘 챙기 묵어라꼬 그라는기라. 그라고 벌떡 일어서는 거를 내가 그마 확 안자빨티리 삐릿나."
"머? 걸레 니가?"
요즘으로 말하면 성폭행을 했다는 뜻인데 아무리 걸레였지만 그것 역시 나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어서 나는 왕방울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참말이다. 그라고 산을 내려오면서 돌아보이까 순실이는 퍼질러앉아 울고있고 풀밭에 하얀 찔레꽃이 어떠큼 곱던지…"
"새 빠질 놈! 그 지랄을 하고 찔레꽃은 무신…"
"앙이다. 그때 내가 무신 생각을 했는줄 아나?"
"생각은 무신 생각! 하얀 찔레꽃을 보이까 저런 순결을 훔쳤으이까 나는 백번 죽어도 싼 놈이다. 그런 생각을 했겠지."
"맞다. 니는 대학교수보다 역시 소설가가 낫겠다. 그라고 또 무신 생각을 했는 줄 아나?"
"그 주제에 또 생각을 했다꼬?"
"그래. 그 가스나 하고 결혼을 하기는 영영 글렀고 후제 내가 그 가스나 보란 듯이 성공해 갖고, 그래서 죽으믄 내 무덤 앞에 저런 찔레꽃이나 한다발 갖다놓고 그때는 잘못했다고, 그라고 그 가스나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걸레 신찬수였다는 소리나 해줬으믄… 그런 생각을 했다. 우습제?"
"그래, 우습다. 그라이까 니 혼자만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제?"
"하모.'
그때 나는 보았다. 기운 없이 끄떡이는 그의 해골 같은 얼굴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나눈 사흘 후에 걸레 신찬수는 쉰여덟의 아까운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병원 영안실에 까만 양장을 한 어느 초로의 여인네가 찬수의 빈소 앞에 한아름 찔레꽃을 놓고 있는 걸 우리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돌아간 다음 방명록에는 곱디고운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잘 가시오. 양순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여인은 찬수의 피 맺힌 마음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그 하얀 찔레꽃 다발을 한 송이라도 상할 새라 조심스레 가져가서 그의 무덤 속에 넣었다.
<2025. 2월 호에 계속>
고교 시절에 말이지 찬수(申贊守)는 이미 오래 전에 걸레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십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옛 추억이 재미 있어서 그를 그냥 걸레라고 불렀고 사람 좋은 찬수는 그때마다 싱글벙글 웃으며 오냐, 오냐 그랬다. 그와 오래 동안 교분이 없는 동기들도 아마 '신찬수' 보다는 '신걸레' 라면 얼른 기억이 나리라.
고등학교 시절의 개차반 신찬수. 걸레도 그냥 걸레가 아니라 빨아도 빨아도 시어빠진 냄새가 나는 신걸레라면 "아, 그라이 알겄다" 그럴 것이다.
별명 그대로 고교 시절의 찬수는 아무도 못말리는 개차반,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문제 학생이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미처 일주일도 안되는 점심시간에 학교 담을 뛰어넘어 초량시장 끝에 있었던 한밭극장에 '자유부인 속편'을 보러갔다가 지도교사단에 걸려서 당시 훈육주임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P고교가 생긴 이래 입학 후 최단 시간에 무기정학을 기록한 놈"이 바로 걸레 신찬수다. 말도 마라.
그 후로도 별의별 못된 짓거리로 유기·무기정학을 밥 먹듯이 맞았는데 신기하게도 퇴학은 커녕 낙제 한번 안하고 졸업을 해서 일류는 아니지만 서울의 D대학 경영학과에 보란 듯이 처억 붙어서 사람들은 컨닝을 해서 들어갔다느니 그게 아니라 그 자슥이 공부 하나는 걸레로 안했다느니 참 말도 많았다.
그런데 그 걸레가 대학에 입학을 한 후에는 백팔십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무슨 쇼크를 받았든지 아니면 무슨 피 맺힌 결심을 했던 게 분명한데 대학 4년을 내리 장학생으로 졸업을 하고 재벌 종합상사에 들어가서 3년쯤 있더니 일찌감치 탈(脫) 월급장이를 선언하고 나서서 사십대 초반에 벌써 엄청난 규모의 생산공장을 갖추고 종업원이 오백명도 넘는 굴지의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또 하나 모를 일이 그 헌출한 용모에 죽을 때 까지 독신으로 지냈는데 암튼 그 걸레하고 나는 국민학교때부터 단짝이었다. 지금이야 대학교수로, 또한 사계(斯界)에서는 알아주는 소설가로 의젓하기 짝이 없지만 고백컨데 고교시절 나의 별명 역시 '준(準)걸레' 였고 기실 '한밭극장 사건'에 나도 공범이었다.
각설하고, 그 신걸레가 2~3년 전부터 시들시들하더니 마침내 폐암 말기라는 확진을 받고 꼼짝없이 대학병원에 누워 있는지도 벌써 6개월째. 본인도 이제는 가망이 없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고 드디어 담당 의사도 그의 주변 정리를 위해 길어야 이제 한달 쯤이라고 며칠 전에 조용히 최후통첩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도 나는 문병을 갔다. 간병을 해오던 제 누이동생으로부터 전화로 그런 사연을 들었던 터라 그날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병상 곁에 앉자마자 그가 먼저 기다렸다는듯이 입을 뗐다.
"마침 잘왔다. 니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스나 사건으로 내가 또 정학을 묵은 거 알제?"
이제 죽마고우한테 무슨 비장한 유언이라도 하는가 부다 했는데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린가 싶어 나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미친 놈. 죽을 때가 되어 실성을 했나. 고등학교때 걸레 니가 정학을 묵은기 어데 한두번이가?"
"앙이다. 니말 마따나 죽을 때도 됐고 오늘은 내 니 한테 꼭 이 사연은 털어놔야겠다."
"사연이라이, 무신?"
우리 나이를 지천명(知天命) 이라고 했다더니 걸레는 죽음을 선고받은 하루만인데도 그렇게 초연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안즉 와 결혼을 안했능가 하문 그때 그 순실이 때문인기라."
"머라꼬?"
"그라고, 그때 나는 정학이 아이라 퇴학을 당해야 했던 거라꼬."
"그거는 또 무신 소리고?"
아스라한 기억으로 찬수가 말하는 그때란 그가 교내외로 걸레라는 명성(?)이 한껏 드높았던 무렵 인근 K여고의 여학생을 한밤중에 무지막지하게 손찌검을해서 졸업을 두어달인가 앞두고 또 일주일 정학을 맞았던 사건이었다.
까닭인 즉슨 우리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양순실이란 그 여학생이 찬수더러 걸레라고 놀렸다는 건데 지금 생각해도 그가 정학을 맞았던 이유 치고는 가장 시시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때 사실은 순실이 하고 내 하고는 무지 무지하게 좋아했던 사인기라. 걸레를 걸레라 카지 그라믄 행주라 카겠나."
퀭한 그의 시선이 40년전 그때를 찾는 듯 창밖에 미동도 없이 박혀 있었고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기 학교 뒷산 수원지였고 그날 밤에 나는 일생일대의 고백을 했능기라. 대학교를 졸업하믄 내캉 살자꼬, 내 하고 결혼해서 평생 깨소곰 매로 살자꼬."
나는 그야말로 흥미진진이었다. 그때 찬수가 아무리 걸레같은 짓거리들을 하고 다녀도 여학생에 연루된 사건은 하나도 없었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이유가 설마 그 순실이란 여학생 때문이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찬수의 시선은 그대로 창밖에 박혀 있었다.
"그랬는데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싫다 카능기라. 그때 나도 입시공부를 쪼매 해본다꼬 시간이 없어서 한 두어달 못만났는데 고새 고기 고렇게 변해 삐린줄은 누가 알았겠노? 변한 정도가 아니라 그때 머라켓는 줄 아나?"
"머라켓는데?"
"대학은 고사하고 인자 걸레짓이나 고만 하라는기라. 깨소곰은 놔두고 앞으로 세끼 밥이나 잘 챙기 묵어라꼬 그라는기라. 그라고 벌떡 일어서는 거를 내가 그마 확 안자빨티리 삐릿나."
"머? 걸레 니가?"
요즘으로 말하면 성폭행을 했다는 뜻인데 아무리 걸레였지만 그것 역시 나로서는 상상이 안되는 일이어서 나는 왕방울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참말이다. 그라고 산을 내려오면서 돌아보이까 순실이는 퍼질러앉아 울고있고 풀밭에 하얀 찔레꽃이 어떠큼 곱던지…"
"새 빠질 놈! 그 지랄을 하고 찔레꽃은 무신…"
"앙이다. 그때 내가 무신 생각을 했는줄 아나?"
"생각은 무신 생각! 하얀 찔레꽃을 보이까 저런 순결을 훔쳤으이까 나는 백번 죽어도 싼 놈이다. 그런 생각을 했겠지."
"맞다. 니는 대학교수보다 역시 소설가가 낫겠다. 그라고 또 무신 생각을 했는 줄 아나?"
"그 주제에 또 생각을 했다꼬?"
"그래. 그 가스나 하고 결혼을 하기는 영영 글렀고 후제 내가 그 가스나 보란 듯이 성공해 갖고, 그래서 죽으믄 내 무덤 앞에 저런 찔레꽃이나 한다발 갖다놓고 그때는 잘못했다고, 그라고 그 가스나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걸레 신찬수였다는 소리나 해줬으믄… 그런 생각을 했다. 우습제?"
"그래, 우습다. 그라이까 니 혼자만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제?"
"하모.'
그때 나는 보았다. 기운 없이 끄떡이는 그의 해골 같은 얼굴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나눈 사흘 후에 걸레 신찬수는 쉰여덟의 아까운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병원 영안실에 까만 양장을 한 어느 초로의 여인네가 찬수의 빈소 앞에 한아름 찔레꽃을 놓고 있는 걸 우리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돌아간 다음 방명록에는 곱디고운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잘 가시오. 양순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여인은 찬수의 피 맺힌 마음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그 하얀 찔레꽃 다발을 한 송이라도 상할 새라 조심스레 가져가서 그의 무덤 속에 넣었다.
<2025. 2월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