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과 풀빵에 꽃피운 우정
박구하(18회)
세월은 돌이킬 수 없어 그립고, 추억은 돌아볼 수 있어 고맙다. 세월도 사랑도 모두 가고 마는 것이나 그 세월에 새긴 흔적은 남는 것, 그 흔적은 다시 고칠 수 없고 다만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학창시절은 살아가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이나 하찮은 먹거리에서도 살아난다. 그 먹거리 중에 호떡과 풀빵은 뜨거워 맨손으로 이리저리 굴려가며 먹는 맛이 일품이고, 호떡은 ‘빠딱조-’를 둘로 접어 거머쥐고 한입 베어 물면 손가락에 전해오는 따끈따끈한 온기와 입에 화끈거리는 쫀득쫀득한 맛이 그저 그만이다.
나는 이 맛을 지난 2월, 「오페라의 유령」이 상연되고 있는 서울 강남 역삼역 입구에서 맛볼 수 있었다. 첨단의 도시 일각에 여전한 호떡파는 이동마차라... 묘한 대비이다.
몇 해 전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옥이이모」는 5~60년대를 겪은 세대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거기에는 넝마주이, 뻥튀기 장수, 풀빵장수, 색주가 등이 나오는데 이런 풍경은 우리 학창시절 초량천변 시장 쪽으로 내려가는 곳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호떡은 가격이 좀 비싸 손태완(부산 삼성의원장)이 같은 물주가 있거나 아니면 꼬불쳐 놓은 돈으로 살짝 혼자 사먹고 입을 싹 닦아야 했다.
배고팠던 시절의 단골메뉴 ‘호풀파티’
풀빵과 호떡은 다같이 밀가루를 쓰지만 약간 다르다. 호떡은 빈대떡처럼 둥글 납작하고 속에다 누런 설탕을 넣고 맨틀에 꾹꾹 눌러 구워내지만, 풀빵은 ‘얼라’들 주먹만하게 움푹움푹 구멍이 파인 시커먼 쇠틀에 허연 반죽을 주전자로 들이부은 후 젓가락으로 앙꼬를 척, 척 떼어 넣고는 연탄불에 휘휘 몇 바퀴 돌렸다가 뚜껑을 열면 되는 것이다.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앉은자리에서 몇 개씩 먹고 나중에는 개수 때문에 주인과 언쟁이 붙기도 하였다.
풀빵과 호떡은 당시 별다른 간식거리가 없던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영화관에 갈 때 사들고 가기도 했고, 당구장에서의 내기대상이기도 했다. 하교시에는 빙 둘러서서 시켜먹으며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여럿이 달려들면 개수를 세기 어려워 주인은 늘 눈을 희번덕거렸으나 우리들은 단독으로 가는 것보다 이렇게 무리 지어 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야 몇 개쯤 눈치껏 공으로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한번은 5반의 7인방 중에 몇 놈이 풀빵을 실컷 먹고 소주까지 시켜먹은 후 돈이 부족하자 셈이 틀린다고 주인과 언쟁이 붙었다.
“앙이, 그라모 우리가 도둥놈이다 이 말인교?”
“이눔아들아, 내가 굽는 깐이 있는데 앙이라카몬 나는 우야란 말이고?”
“아이씨요, 우리도 묵는 깐이 있는데 을매나 더 무~따고 막말하기요?” 얼굴이 벌개 가지고 ‘싱갱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학생에게 술을 판 죄 때문에 풀빵장수가 질 수밖에 없었다.
이 호떡과 풀빵은 70년에 우리 경제가 수출주도형으로 개발붐을 타면서 먹거리가 다양해지자 시나브로 사라지고 떡볶이나 족발문화로 바뀌어 갔다. 요즘 호빵, 붕어빵이 그 후손쯤 될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시절 차지하던 비중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런데, 이 호떡이 최근 이웃나라 일본에서 유령처럼 되살아나 히트를 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보도한 2002. 1. 29자 일본 <도쿄스포츠>신문 기사를 보자.
일본 도쿄 중심가 신주쿠의 유흥거리 ‘가부키쵸’에서는 사람들 이 뜨거운 ‘홋도꾸’(호떡)를 먹으며 한국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호떡 파는 포장마차가 저녁 해만 지면 생겨난다. 호떡은「밀가루를 잘 반죽한 다음 그 안에 굵은 설탕을 넣어 철판에 구워 만든 한국의 간식」으로 따끈따끈한 호떡 안의 끈적거리는 설탕물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옛 맛을, 젊은이에게는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한 개 200엔(약 2,000원)으로 타 음식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갈수록 인기만점이다.
수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한국의 소주가 칵테일용으로 희석되어 퇴근길의 ‘다찌노미’ 파들에게 인기를 끌어오고 있는 것은 나도 직접 일본에서 본 바이지만, 무명의 우리 호떡이 ‘홋도꾸’가 되어 일본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니 놀라운 뿐이다. 값싸고 좋은 것은 시대의 변천이나 문명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인가. 무엇이든 모방을 잘하는 일본이 이 호떡을 ‘홋도꾸’로 개명하여 ‘기무치’처럼 세계시장으로 먼저 달려갈는지 모른다.
비약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호떡은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 만하다. 미국은 어디를 가도 맥도날드보다 흔한 것이 ‘핫도그’(hot dog)인데 이 핫도그도 실은 우리의 「호떡」을 음차(音借)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본다. 한국전쟁에서 호떡맛을 본 미군들이 돌아가 핫도그를 개발할 때 음차한 것이 아닐까.
핫도그는 길쭉한 빵 속에 소시지를 넣고 절인 오이에 겨자소스를 처발라 먹는 간이 음식이다. 언제부턴가 미국의 퍼블릭 골프장은 한국인들이 거의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 구내 식당에는 어김없이 한국의 컵라면, 아바이 순대 등이 버젓한 메뉴가 되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또, 현재 유럽에서 “미스터 리(Mr.Lee)”라는 브랜드로 우리 라면이 현지 한국인에 의하여 개발되어 시장을 석권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 이쯤 되면 어떤가. 우리 호떡이 김치처럼 세계의 간식거리로 주름잡을 만하지 않겠는가.
호떡이나 풀빵을 우리 부고생들만 먹은 것은 아니겠지만 유달리 촌놈이 많았던 가난한 우리들의 학창시절에 이를 빼놓고 추억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한 달에 몇 번씩 벌어지는 하숙집 파티에 단골메뉴는 “호떡과 풀빵”이었다. 어지간히 지겨웠으면 “또, ‘ 호풀’ 파티냐?” 라고까지 했을까.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야, 불캐라. 불캐!” 호떡이 유죄
그런데, 이쯤에서 호떡과 관련하여 그냥 공개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가지 할까한다. 당시에 부산의 적선지대는 외국선원들의 전용무대인 우리 학교 바로 밑에 있던 텍사스촌 말고 서면 하알리야 부대 근처 오팔팔과 서부 쪽에 완월동이 있었는데 이런 곳은 우리 학생들로서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었다. 완월동의 바로 밀 동네가 충무동인데 이곳은 완월동과는 달리 값싼 먹거리와 난전, 색주가, 여인숙 등이 밀집하여 흥청거리는 역동적인 곳이다. 자갈치를 끼고 있는 이 일대는 부산의 남항으로서 어선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외지에서 온 선원들이 부두까지 따라나온 아내와 출항을 앞둔 마지막 이별의 밤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서민들의 애환이 얽혀 먹거리, 볼거리가 많았다.
운 좋게(?) 이 근처에 친척집을 두고 있는 놈이 하나 있었다. 그는 유난히 호떡을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이 놈이 호떡 먹을 욕심으로 자기 친척집에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가자고 몇몇이를 꼬셨다. 대신 호떡을 사 가야한다고 하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두말 없이 따라갔다. 뒷 차장이 ‘오라이’ 신호로 줄을 당겨 종을 두 번 땡땡 쳐야 떠나는 전차를 타고 완월동을 먼발치로 보며 내렸다. 비릿한 갯내가 나는 부두 쪽으로 들어가니 집들은 모두 적산가옥들로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조용할 때는 코고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친척집의 건너편 집은 이층으로 된 여인숙이었다. 이층 쪽방에서 사가지고 간 호떡을 먹으며 노닥거리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무슨 구경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밤이 늦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게 아닌가. 모두들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다들 눈을 빛내며 덩달아 숨이 막히는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까부터 길가 쪽 벽창문에 막아놓은 판자구멍을 통해 밖을 엿보던 놈이 손짓을 한다. 여기를 보라는 것이다. 아, 구멍에 눈을 대자마자 벌어지는 광경이란! 그것은 바로 비디오였다. 날씨가 더워선지 창문을 열어놓고 두 남녀가... 불까지 켜 놓고... 구멍을 돌려보던 놈들이 서로 더 오래보려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전등불을 확, 꺼버리는 게 아닌가. 갑자기 볼거리가 없어지자 어느 놈인지 다급한 김에 “야, 불캐라. 불캐!” 하고 외쳐댔다. 황급히 말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물론 저쪽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불을 켜줄 리 있겠는가. 아, 창문에 불은 꺼지고 꿈은 사라지고...
이 일이 있고부터 이 친구는 친구들로부터는 선망의 적이 되었지만, 영업에 지장을 받게 된 옆집에서 뭐라고 하였는지 더 이상 친척집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친구 좋은 일 시키려다 본인이 피해를 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호떡이 유죄였다.
<2025. 4월 호에 계속>
호떡과 풀빵에 꽃피운 우정
박구하(18회)
세월은 돌이킬 수 없어 그립고, 추억은 돌아볼 수 있어 고맙다. 세월도 사랑도 모두 가고 마는 것이나 그 세월에 새긴 흔적은 남는 것, 그 흔적은 다시 고칠 수 없고 다만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학창시절은 살아가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이나 하찮은 먹거리에서도 살아난다. 그 먹거리 중에 호떡과 풀빵은 뜨거워 맨손으로 이리저리 굴려가며 먹는 맛이 일품이고, 호떡은 ‘빠딱조-’를 둘로 접어 거머쥐고 한입 베어 물면 손가락에 전해오는 따끈따끈한 온기와 입에 화끈거리는 쫀득쫀득한 맛이 그저 그만이다.
나는 이 맛을 지난 2월, 「오페라의 유령」이 상연되고 있는 서울 강남 역삼역 입구에서 맛볼 수 있었다. 첨단의 도시 일각에 여전한 호떡파는 이동마차라... 묘한 대비이다.
몇 해 전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옥이이모」는 5~60년대를 겪은 세대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거기에는 넝마주이, 뻥튀기 장수, 풀빵장수, 색주가 등이 나오는데 이런 풍경은 우리 학창시절 초량천변 시장 쪽으로 내려가는 곳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호떡은 가격이 좀 비싸 손태완(부산 삼성의원장)이 같은 물주가 있거나 아니면 꼬불쳐 놓은 돈으로 살짝 혼자 사먹고 입을 싹 닦아야 했다.
배고팠던 시절의 단골메뉴 ‘호풀파티’
풀빵과 호떡은 다같이 밀가루를 쓰지만 약간 다르다. 호떡은 빈대떡처럼 둥글 납작하고 속에다 누런 설탕을 넣고 맨틀에 꾹꾹 눌러 구워내지만, 풀빵은 ‘얼라’들 주먹만하게 움푹움푹 구멍이 파인 시커먼 쇠틀에 허연 반죽을 주전자로 들이부은 후 젓가락으로 앙꼬를 척, 척 떼어 넣고는 연탄불에 휘휘 몇 바퀴 돌렸다가 뚜껑을 열면 되는 것이다.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앉은자리에서 몇 개씩 먹고 나중에는 개수 때문에 주인과 언쟁이 붙기도 하였다.
풀빵과 호떡은 당시 별다른 간식거리가 없던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영화관에 갈 때 사들고 가기도 했고, 당구장에서의 내기대상이기도 했다. 하교시에는 빙 둘러서서 시켜먹으며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여럿이 달려들면 개수를 세기 어려워 주인은 늘 눈을 희번덕거렸으나 우리들은 단독으로 가는 것보다 이렇게 무리 지어 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야 몇 개쯤 눈치껏 공으로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한번은 5반의 7인방 중에 몇 놈이 풀빵을 실컷 먹고 소주까지 시켜먹은 후 돈이 부족하자 셈이 틀린다고 주인과 언쟁이 붙었다.
“앙이, 그라모 우리가 도둥놈이다 이 말인교?”
“이눔아들아, 내가 굽는 깐이 있는데 앙이라카몬 나는 우야란 말이고?”
“아이씨요, 우리도 묵는 깐이 있는데 을매나 더 무~따고 막말하기요?” 얼굴이 벌개 가지고 ‘싱갱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학생에게 술을 판 죄 때문에 풀빵장수가 질 수밖에 없었다.
이 호떡과 풀빵은 70년에 우리 경제가 수출주도형으로 개발붐을 타면서 먹거리가 다양해지자 시나브로 사라지고 떡볶이나 족발문화로 바뀌어 갔다. 요즘 호빵, 붕어빵이 그 후손쯤 될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시절 차지하던 비중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런데, 이 호떡이 최근 이웃나라 일본에서 유령처럼 되살아나 히트를 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보도한 2002. 1. 29자 일본 <도쿄스포츠>신문 기사를 보자.
일본 도쿄 중심가 신주쿠의 유흥거리 ‘가부키쵸’에서는 사람들 이 뜨거운 ‘홋도꾸’(호떡)를 먹으며 한국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호떡 파는 포장마차가 저녁 해만 지면 생겨난다. 호떡은「밀가루를 잘 반죽한 다음 그 안에 굵은 설탕을 넣어 철판에 구워 만든 한국의 간식」으로 따끈따끈한 호떡 안의 끈적거리는 설탕물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옛 맛을, 젊은이에게는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한 개 200엔(약 2,000원)으로 타 음식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갈수록 인기만점이다.
수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한국의 소주가 칵테일용으로 희석되어 퇴근길의 ‘다찌노미’ 파들에게 인기를 끌어오고 있는 것은 나도 직접 일본에서 본 바이지만, 무명의 우리 호떡이 ‘홋도꾸’가 되어 일본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니 놀라운 뿐이다. 값싸고 좋은 것은 시대의 변천이나 문명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인가. 무엇이든 모방을 잘하는 일본이 이 호떡을 ‘홋도꾸’로 개명하여 ‘기무치’처럼 세계시장으로 먼저 달려갈는지 모른다.
비약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호떡은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 만하다. 미국은 어디를 가도 맥도날드보다 흔한 것이 ‘핫도그’(hot dog)인데 이 핫도그도 실은 우리의 「호떡」을 음차(音借)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본다. 한국전쟁에서 호떡맛을 본 미군들이 돌아가 핫도그를 개발할 때 음차한 것이 아닐까.
핫도그는 길쭉한 빵 속에 소시지를 넣고 절인 오이에 겨자소스를 처발라 먹는 간이 음식이다. 언제부턴가 미국의 퍼블릭 골프장은 한국인들이 거의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 구내 식당에는 어김없이 한국의 컵라면, 아바이 순대 등이 버젓한 메뉴가 되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또, 현재 유럽에서 “미스터 리(Mr.Lee)”라는 브랜드로 우리 라면이 현지 한국인에 의하여 개발되어 시장을 석권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 이쯤 되면 어떤가. 우리 호떡이 김치처럼 세계의 간식거리로 주름잡을 만하지 않겠는가.
호떡이나 풀빵을 우리 부고생들만 먹은 것은 아니겠지만 유달리 촌놈이 많았던 가난한 우리들의 학창시절에 이를 빼놓고 추억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한 달에 몇 번씩 벌어지는 하숙집 파티에 단골메뉴는 “호떡과 풀빵”이었다. 어지간히 지겨웠으면 “또, ‘ 호풀’ 파티냐?” 라고까지 했을까.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야, 불캐라. 불캐!” 호떡이 유죄
그런데, 이쯤에서 호떡과 관련하여 그냥 공개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가지 할까한다. 당시에 부산의 적선지대는 외국선원들의 전용무대인 우리 학교 바로 밑에 있던 텍사스촌 말고 서면 하알리야 부대 근처 오팔팔과 서부 쪽에 완월동이 있었는데 이런 곳은 우리 학생들로서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었다. 완월동의 바로 밀 동네가 충무동인데 이곳은 완월동과는 달리 값싼 먹거리와 난전, 색주가, 여인숙 등이 밀집하여 흥청거리는 역동적인 곳이다. 자갈치를 끼고 있는 이 일대는 부산의 남항으로서 어선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외지에서 온 선원들이 부두까지 따라나온 아내와 출항을 앞둔 마지막 이별의 밤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서민들의 애환이 얽혀 먹거리, 볼거리가 많았다.
운 좋게(?) 이 근처에 친척집을 두고 있는 놈이 하나 있었다. 그는 유난히 호떡을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이 놈이 호떡 먹을 욕심으로 자기 친척집에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가자고 몇몇이를 꼬셨다. 대신 호떡을 사 가야한다고 하였다. 좋은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두말 없이 따라갔다. 뒷 차장이 ‘오라이’ 신호로 줄을 당겨 종을 두 번 땡땡 쳐야 떠나는 전차를 타고 완월동을 먼발치로 보며 내렸다. 비릿한 갯내가 나는 부두 쪽으로 들어가니 집들은 모두 적산가옥들로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조용할 때는 코고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친척집의 건너편 집은 이층으로 된 여인숙이었다. 이층 쪽방에서 사가지고 간 호떡을 먹으며 노닥거리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무슨 구경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밤이 늦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게 아닌가. 모두들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다들 눈을 빛내며 덩달아 숨이 막히는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까부터 길가 쪽 벽창문에 막아놓은 판자구멍을 통해 밖을 엿보던 놈이 손짓을 한다. 여기를 보라는 것이다. 아, 구멍에 눈을 대자마자 벌어지는 광경이란! 그것은 바로 비디오였다. 날씨가 더워선지 창문을 열어놓고 두 남녀가... 불까지 켜 놓고... 구멍을 돌려보던 놈들이 서로 더 오래보려고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전등불을 확, 꺼버리는 게 아닌가. 갑자기 볼거리가 없어지자 어느 놈인지 다급한 김에 “야, 불캐라. 불캐!” 하고 외쳐댔다. 황급히 말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물론 저쪽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불을 켜줄 리 있겠는가. 아, 창문에 불은 꺼지고 꿈은 사라지고...
이 일이 있고부터 이 친구는 친구들로부터는 선망의 적이 되었지만, 영업에 지장을 받게 된 옆집에서 뭐라고 하였는지 더 이상 친척집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친구 좋은 일 시키려다 본인이 피해를 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호떡이 유죄였다.
<2025. 4월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