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만담[제24화] 아, 김민부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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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혹자는 부산고 출신 중에 내세울 만한 위대한 문인이 있느냐고 묻는다. ‘위대한’이라는 말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왜 없겠는가.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우리 곁에 生佛(생불)이 있는데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많지 않은가. 그런데 정말로 그런 시인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바로 김민부(11회) 시인이다. 그 섬뜩한 천재성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일찍 타계한 김민부! 그는 모교와 부산을 뛰어넘어 국민적 시인이 된 첫 부고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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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김민부가 지은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시다. 이 시는 장일남이 곡을 붙이고 테너 박인수가 불러 더 유명해진 국민 애창가곡이다. 사람이 외로워도 그냥저냥 사는 것은 왜일까. 기다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다림을 이토록 쉬운 말로, 이토록 절절하게 풀어낸 시가 또 있을까. 그 기다림은 외로운 산모퉁이에 홀로 서 있는 망부석의 슬픈 사연이라고 해도 좋고, 이산가족의 그것이라고 해도 좋다. 기다림이 소중한 것은 기다림이야말로 ‘없는 자’와 ‘잃은 자’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사무친 사람에게는 도로 빼앗을 수 없는 명시이다.

김민부(본명:김병석) 동문은 부친 김상필의 6남매 중 장남으로 1941년 부산 수정동에서 태어나 성남초등교를 거쳐 모교 2학년 때 첫 시집 「항아리」를 내고 기다림과 그리움을 노래하다 32살 때 요절한, 이제는 그 자신이 그리움의 대상이 된 시인이다. 부산고 2년 재학시절에 동아일보,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밤의 편력」, 시조 「균열」로 2년 연속 당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천재다. 그는 고교 시절 부산·경남은 물론 전국의 문예콩쿨을 휩쓸어 우리에게는 불란서의 천재시인 랭보만큼 전설 같은 존재였다. 고교생이 일반 무대에서 신춘문예로 당선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 김민부는 문학지망생인 우리에게는 닿지 못할 별이자 희망이었다. 이 기록은 부산고 문예반의 자랑이 되어 후배 문예반원의 도전 심리를 자극, 고교 재학중 신춘문예 당선의 전통을 만들었다. 나는 「기다리는 마음」도 좋지만 김민부의 시조 「균열」을 더 좋아한다. ‘달이 오르면 배가 고파/ 배고픈 바위는 말이 없어/ 할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조는 사람이 아닌 신운(神韻)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읽을 때마다 숨이 멎는 느낌을 받는다.

 

요절한 우리 시대 국민적 시인

김민부는 그의 대학 동기생인 이근배 시인(현 한국시인협회장)이 지금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시인이다. 이근배가 문학세계에서 일등병이라면 김민부는 4성장군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언젠가 내가 이근배 시인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그는 내가 부산 출신임을 알고 대뜸 김민부 시인을 아느냐고 하여 나의 고교 선배라고 하자 그는 반색을 하며 나를 그 보듯 가까이 대해 주었다. 이근배 시인 또한 1961년에서 1964년 사이에 조선, 동아, 한국, 경향, 서울신문에서 시, 시조, 동시 부문의 신춘문예를 모조리 휩쓴 천재시인으로 지금 한국시단의 중심에 서 있는 분인데 그런 천재시인이 자기를 능가하는 천재시인으로 김민부를 지목하고 외경한다고 하였다. 김민부야말로 지금까지 부산고가 배출한 최고의 시인이라고 부르면 과언이 될까. 좀 더 살았더라면 최고의 서정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을 것인데 참으로 애석하다. 김민부 시인과 동문이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로 나는 문단의 비중 있는 시인들과 수월히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김민부는 서라벌 예대와 동국대(62년)를 나온 후 생활고로 천재성과는 상관없는 방송작가로 활약을 하면서 수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시조 외에 시 「항아리」, 「고도」, 「기러기」, 오페라 대본 「원효대사」, 제2시집 『裸婦와 새』 등이 있다. 그는 시와 시조에 두루 능하였다. 특히 그의 시는 시조의 율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시 전편에는 강한 음악성이 깔려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시적 천재성은 생업에 쫓겨 제대로 발휘될 시간이 없었다. 100kg을 오르내리는 거구에 이국적인 눈망울로 끊임없이 원고지를 메워 나가던 그 무서운 필력은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드라마도 쓰고, 쇼 프로도 구성하고, 「웃으면 복이와요」 대본도 썼는가 하면, 시사 프로그램, 방송 에세이도 썼고, 시추에이션 드라마 등 닥치는 대로 써나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부산 MBC 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인 「자갈치 아지매」의 최초의 PD가 김민부였다. 여기서 그 당시 같은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윤청광 씨의 글을 잠깐 인용해 보자.

「비위가 약한 나는 내 성격에 맞지 않은 프로그램은 청탁이 들어와도 사양하기 일쑤였는데, 김민부 형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보거래이, 청탁은 물리치는 게 아닌 기야. 무슨 프로그램이 건 청탁 오는 대로 다 써야 하는 기라.” 방송작가의 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사양하다가는 굶어 죽기 알맞다는 충고였다. 그래서 그는 매일 나가는 프로그램만 해도 이 방송 저 방송에 대여섯 개나 되었다. 동아방송에는 「밤의 플랫폼」, 기독교방송에는 「장군 멍군」, MBC에는 「영이네 집」 등 집필하는 프로그램이 수두룩했다. MBC 작가실 바로 내 옆 책상에서 그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글을 쓰곤 했는데, 그 숨소리가 어찌나 거셌던지, 그는 꼭 불 맞은 멧돼지 같은 거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 뒷자락을 곧잘 허리 밑 까지 흘리고 다니던 그는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으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수도꼭지에 머리를 박고 찬물을 뚝뚝 흘리면서 작가실로 돌아오곤 했었다. 참으로 열심히, 참으로 끈질기게 글을 썼고, 참으로 많이도 술을 마셨다. 어느 날 내가 병 들어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우리 집에 열흘쯤 누워 있을 때 그는 먼길을 김영곤 선생과 함께 걷고 걸어서 귤 한 상자 사 들고 문병을 왔었다. “죽으믄 안 된데이, 퍼뜩 일나거라아.” 그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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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그런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글을 쓰다가 난로가 엎어지는 바람에 일어난 불로 젊은 나이에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저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적십자병원에서 작가들의 정성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서 한운사 선생은 “가난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한다”고 조사를 해서 우리 모두를 다시 한 번 울게 하기도 했는데… 너나 없이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동료 작가들이 우정을 모아서 장례를 치르고 단 얼마의 돈을 남겨 부인 손에 전해드렸더니, 홀로 되신 부인은 가끔씩 작가협회에 꽃을 사 들고 찾아오셨는데, 이제는 그나마 소식이 없다.」

 

다시 뜨는 일출봉과 월출봉

죽으면 안 된다고 해놓고 저 자신이 먼저 죽어버린 이 아이러니를 어찌 보아야 할까. 우리 시단의 큰 별이 되었을, 부산고 출신 문인들의 지주요 희망이었던 김민부의 요절은 두고두고 애석하다. 1972년 겨울, 서울 갈현동 집에서의 김민부의 돌연한 죽음을 두고 방화에 의한 자살이라는 설도 있으나, 어떤 청탁도 거부하지 않고 아무리 허접스러운 일감이라도 주어지면 열심히 해내며, 어떤 고통도 강한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이겨내고 있었던 그가 자살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위의 글처럼 집필 중 자기 실화에 의한 사고사인 것이다. 지금 그 가족들이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수년 전 내가 문인 행사차 거제도에 갔을 때 그가 거제도와 연고가 있다고 하며 가족을 찾는다는 거제시청 직원의 수소문이 내게 닿았으나 나는 아직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시비는 지금 제주 성산포에 있으나 ‘일출봉’과 ‘월출봉’ 부산에도, 거제도에도, 한강이든, 백두산이든 이 나라 이 강산이면 어디에나 있는 것이니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민중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1995년에는 동문들의 주선으로 시와 대본 등을 모은 그의 유고집이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라는 이름으로 민예당에서 출간되었다. 2000년에 부산시가 펴낸 「정말 부산을 사랑한 사람들」이란 책에 김민부는 첫 번째 인물로 나온다.

지금 부산 암남동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으나 김민부는 시비 한두 개로는 부족한 사람이다. 어떤 곳보다도 바다와 오륙도가 바라보이는 모교 교정에 세웠으면 한다.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는 그 그리움에 다시 젖고, 자라는 후배들은 그 시적 정서에 젖어 대를 이어 초록 꿈을 키워나갈 그런 시비 하나 세웠으면 한다. 모교 교정에!

 

『청조인』 2003년 3월(1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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