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에세이_ 나의 텃밭 /2020년 10월호

관리자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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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호 | 18회 


나의 텃밭


내가 시골에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농사가 재미있기 때문이지만 그 밖에도 몇 가지 놓치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 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날 벽난로 앞에서 장작이 타면서 연출하는 불꽃의 춤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는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내 밭을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이에 땅거미가 젖어 드는 시간에 이따금 다락 창가에 혼자 앉아서 눈앞의 밭과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가벼운 만족감으로 행복을 느낀다. 도시의 아파트 창가에서는 좀처럼 느 낄 수 없는 편안함이다. 비 오는 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가 숲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바라보는 풍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또 농사일이란 식물의 생장과 발육 단계에 따라서 제때에 필요한 일을 해야 하므로 일부러 운동하지 않아도 운동 부족이 될 염려는 없다. 


올해 옥수수는 멧돼지도 실망 

다락 창가에서 내려다보면 한 눈에 모든 재배작물을 살펴볼 수 있는 텃밭에는 주로 아내가 쉽게 수확해서 반찬을 할 수 있는 채소인, 상추· 파·부추· 들깨· 산마늘· 마· 옥수수· 감자· 토마토· 가지· 오이· 풋고추· 배추· 무 등을 심는다. 올해 옥수수 밭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편하지 가 않다. 맛이 좋아 10여 년 동안 씨를 계속 받아 심어 종자가 심하게 퇴화(退化)해 버린 데다가 수염이 나고 이삭이 발달해야 할 때 많은 비가 와서 수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올해는 내년에 심을 종자도 건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며칠 전 밤에 방문한 멧돼지도 몇 개의 옥수숫대를 쓰러트려 보고는 실망했는지 그냥 가버린 것 같다. 

이 텃밭 뒤의 50평 비닐하우스 한 채는 밭 전체를 볼 수 있는 조망을 방해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수확을 시작한 붉은 고추가 두 줄 약 60그루, 그 옆에 2년생 포도나무 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다. 비닐하우스 뒤에는 블루베리· 복분자· 아로니아· 보리수· 복숭아· 자두나무· 배나무· 돌배 나무· 이팝나무· 대왕참나무· 두릅· 엄나무· 사과나무들 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심겨 있어 잡초와 뒤엉켜 자라고 있고 밭의 북쪽 맨 끝에는 산딸기 밭 300평이 있다. 여기까지가 평지이다. 

평지의 절반이 조금 지난 왼쪽부터 농사짓기 힘든, 소위 영농여건 불리농지인 평균 경사가 15% 이상 되는 계단식 밭 9개가 이어져 있다. 이곳에 나는 작년에 상당한 비용을 들여 '눈개승마'라는 산나물 모종을 심었는데 잡초를 이기지 못해 거의 다 죽어버리는 안타까운 경험을 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느낀 경외감 

이 밭에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집과 비닐 하우스 사이의 가로 25m, 세로 15m, 100평 남짓한, 내가 감당하기에 꼭 적당한 크기의 텃밭이다. 지금은 내 마음대로 편하게 농사를 짓지만 10여 년 전 내가 이 땅 제일 남쪽에 남향의 나뭇집을 짓고 이곳에 밭을 일구기 시작했을 때는 땅이 너무나 굳어 있어 삽도 들어가지 않았고 엄청나게 많은 자갈과 바위와 같은 돌들은 나를 질리게 했다. 퇴직하기 오래전부터 주말이나 휴가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어왔지만 나는 토양이 좋은 곳만 골라 농사를 했고 딱딱하고 척박한 이 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놀랄 정도의 끈질긴 노력 끝에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을 만들어 첫 수확을 했을 때 이 작은 밭이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비와 함께 만들어내는 기적에 감탄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할 때면 내가 마치 신의 창조의 위대한 산실에 시종이라도 된 듯한 깊은 경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이른 봄 얼었던 땅이 녹으면 시작하여 늦은 가을 땅이 다시 얼어붙을 때까지 주로 이 텃밭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은 지 11년이 후딱 지나갔다.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새로운 꿈과 희망은 부풀어 오르고, 농사를 마무리 짓는 초겨울의 석양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이제는 타버려 재만 남은 나의 꿈과 희망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한다. 세월이 갈수록 생각은 쉽게 흩어지고 꿈은 작아지며 희망은 낮아진다. 그러나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말없이 맞이해주는 나의 텃밭에서 갖가지 채소들과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구름과 비를 벗하여 지내는 순간순간들은 더욱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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