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별기고]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_2

관리자
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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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 - 권력의 본질 


정순영 (25회·전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


백 년 후에나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고 하면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권력이라고 니체는 지적했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면서 빼놓지 않고 있던 것 중에 인간이 애써 빼 놓고 무시해 왔던 것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신도 이성도 모두 거부했으므로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최종적인 대안이 권력으로 본 것이고 권력이 생의 원천이고 영원 회귀의 에너지로 본 것이다. 

여하튼 니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서구 지성계에서는 권 력 연구에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에서는 권력이 니체의 사상을 해석하는데 핵심 용어 로 쓰여질 뿐 권력 자체의 연구는 희소하고 사회과학계나 정치현실에서는 정치권력 개념으로 쓰일 뿐이다. 그것도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필요악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권력에 대한 연구는‘아직까지도 찾지 못한 성배’라고 올슨 교수도 말했지만 니체도 확실치 않아서 권력보다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에 중점을 두고 고뇌의 사 색을 거듭하다가 책 출간을 하지 못하고 아포리즘적 단편으로 구성된 유고 속에 그 뜻을 담아놓았다. 


의지, 양심, 사랑을 아우르는 본체 - 권력 

여기서 권력을 정의해 보자면, 권력은 ‘의지와 양심과 사랑을 모두 아우르는 세계와 인간의 본체’이다. 말하자면 태초에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할 때 그 말씀이 바로 권력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태 초에 권력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철학적이고 그리고 또 인문학적이고 사회과학적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도 초기에 철학과 종교의 선각자들도 그렇게 보았지만 권력의 본질이 너무 애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성경이 적절하게 이를 말씀이라고 정리하였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해석과 이해에 대하여 니체가 살아있으면 그도 필경 동의할 것으로 본다. 이제 우리는 권력에 대하여 보다 진중하고 철저하게 연구해 볼 때가 된 것이다. 

권력 연구를 위해 우선 한 가지만 미리 얘기하자면 앞서 인간을 움직이는 세 가지 동인 중 사랑과 권력과의 관계이다. 흔히 사랑이 ‘나누고 배려하는 ’속성 외에 ‘소유하고 강제하는’ 속성이 있다고 하는데 권력도 바로 그런 ‘소유하는 실체성’과 ‘나누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 적인 실체이다. 인간사에서 사랑은 대체로 따뜻하고 배려하는 속성이 90% 이상으로 반면 권력은 차갑고 강제하는 속성이 90% 이상으로 알려져 오면서 억울하게 권력은 잘못 독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사랑도 권력과 진배없이 90% 이상 차갑게 (따뜻함을 빙자하면서) 소유하고 강제하는 속성임을 드러내고 있으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내용을 바꾸고 있다. 

결국 권력은 사랑의 해석과 이해를 통해 볼 때 권력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고 사랑의 다른 이름이 권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양심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전술했는데 거기에 의지를 보탠다면 이 삼자는 결국 태초 에 권력의 세 쌍둥이로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력을 향한 편향된 관점 

한국의 경우 이러한 권력의 연구는 미답의 영역이지만 무 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권력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권력이 원래 그런 거지’라든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든가 ‘권력 의지가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정치와 권력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유아적(幼兒的)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정치는 권력을 수단시하고 현실 정치인들은 권력의 획득과 쟁탈이 권력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한다는 식의 편향된 인식과 관념이 보편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일반 시민들에게조차 아무런 성찰없이 언뜻 보기에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말도 안 되는 권력관이 널리 팽배해 있다. 바로 ‘실체적 권력관’을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실체적 권력관은 서구의 경우 당초 과거 신권(神 權)과 왕권의 정치권력이 세습과 관습에 의한 천부권력으로 인정받아 오던 중세 봉건시대에 충만한 것이었지만 종교개혁과 계몽주의가 차례로 펼친 근대 국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권과 주권이 ‘여럿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여럿으로’ 나누자는 사회계약 사상에 의하여 관계적(이고 절차적)인 권력관으로 수정되거나 보완되었다. 특히 후자의 ‘관계적 권력관’이 바탕이 된 현실정치에서는 ‘토론과 타협’이나 ‘소수자 보호를 전제한 다수결 원칙’을 국정운영의 원칙으로 하는 의회주의의 성립과 의회 민주주의 정치가 문명국가 제도화의 결실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다만 동시대에 전개된 자본주의의 도래와 발전과정에서 경제권력에는 무한 자유경쟁 논리가 배태된 ‘소유하고 쟁탈하는 ’실체적인 권력관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고 그 결과 정치권력 부분에도 이러한 권력관은 강하게 스며들고 위협하여 온 관계로 민주주의 정치는 상당한 위기를 맞아 오면서 지금까지도 수정과 보강을 거듭하고 있다. 알려진 바대로 20세기 초반 파시즘, 볼세비키즘 등 전체주의 광풍과 20세기 후반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열풍도 바로 이러한 권력 사가 낳은 최근 현대사의 장면들이다.

여하튼 서구 민주주의 선진국가들의 경우 두 개의 권력관이 어느 극단으로 간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균형과 조 화를 이루면서 정치와 경제부문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존속해 온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경우 국가형성과 국정 운영의 경험이 아직은 일천하고 미숙하여 ‘실체적 권력관’ 이 지속적으로 우세하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리고 최근에는 더욱 비틀거리는 정치 현상을 노정하고 있다.  


왜곡된 권력관 극복을 위해 균형잡힌 사고와 행동이 필요 

이제 이러한 실체적 권력관을 극복하고 그 수준을 넘어서 는 노력이 없으면 한국의 장래는 계속해서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더구나 세계사적 변동과 갈등의 시대가 다가오는데 이 부분의 치유가 없이는 한국의 앞날은 그냥 국운(國運)에 맡기기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혹자는 미국 트럼프의 정치관과 권력관도 사뭇 그러하지 않느냐고 반문을 하면서 미국도 별 수 없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과 서구정치(일본도 포함된다)는 앞서 얘기했듯이 나누고 배려하는 관계적 권력관이 정치환경을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정치문화화되어 약간의 엇길로 가더라도 제자리를 찾는 ‘제도정치’가 보편화 되고 일반화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의 경우와는 다르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정치의 계절이 왔다고 가슴 두근거리면서 기대를 하는 사람들보다 무언가 불안하고 무거운 추 (錘)가 가슴 한가운데 와있음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 이 현상의 근저에는 권력과 권력현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왜곡과 오해가 장기간 방치되어 오면 서 나타난 역사적이고 구조적이고 심리적인 한국적 특수성 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그러하다. 즉 한국인의 내부에는 권력과 권력 개념이 해방 이후 국가형성기부터 경제성 장기를 거쳐오면서 지금까지 해소되지 못한 이념 갈등, 빈부 갈등 등이 혼합된 한국적 갈등 의식으로 자리잡아 난해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는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 속에 유전자화된 한(恨)과 함께 더욱 거친 개념과 내용으로 세속화되면서 자탄(自歎)과 남 탓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생(自生)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 역시 구조적이고 역사적이고 심리적으로 풀어야 하는 만큼 결코 쉬울 수 없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글의 결론이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을 움직여 온 그 무엇에 대한 지성사적 사유를 다시 가다듬어야 하되 그것 은 극단적이지 않고 다원화되고 균형 잡힌 사고와 행동이 바탕이 된 개인의식, 사회의식 그리고 문화의식의 고양된 자각을 ‘각자 그리고 다 함께’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각된 사람들이 점차 더 늘어나고 서로 격려하면서 그것이 대세가 된다면 그동안 인류가 어렵게 쌓아올리고 있는 문명국가로의 성취가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에서도 달성 가능할 것으로 본다. 물론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부분에 성공을 거두어 온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한국민 그리고 한국정치가 진정한 인류문명의 대장정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는 겸허한 자기성찰을 계속하고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반지성적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사명과 책임이 더없이 요구되고있 다. 


※ 필자의 ‘대한민국 국회 이대로 좋은가’는 유튜브에서 ‘정순영 학술’ 을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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