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_중국을 다시 본다③] 인구사(人口史)로 본 중국문명의 부침 /2020년 10월호

관리자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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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사(人口史)로 본 중국문명의 부침

조현태 중국 섬서성 외국전문가(27회)


평소 중국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오천년 고대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이 지금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 웠던 한당성세(漢唐盛世)의 개방과 포용의 기풍이 사라지고 일견 미개하고 야만적인 문화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소위 ‘니담의 퍼즐’과 유사한 질문이다. 과학사의 대가 니담(Joseph Needham)이 고전적 대작인『중국과학기술사』에서 제기한 질문인데, “4대 발명 등 고대 인류 과학기술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중국에서 왜 근대에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하는 수수께끼이다. 이에 대해 과거 제도, 과학 정신 결여, 강남지역의 철과 석탄 부재 등이 운위되고 있으나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주지하듯이 과거 서구에서는 중국의 역사가 왕조교체에 불과한 정체된 역사이고 헤겔은 중국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가 없다고 혹평한 바 있다. 중국의 역사서는 왕과 귀족 의 족보이거나 황제의 교과서에 불과하고 백성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데 최근 구미와 중국 사학계를 중심으로 서구 중심주의와 일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중국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는 시도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세계사적 시야에서 중국사를 조망하는 캘리포니아학파 등 기후 변화의 영향을 중시하는 환경사와 인구사 등 여러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 여기서는 인구사의 관점에서 중국 문명의 코드를 엿보고자 한다. 


중국인구의 대기대락(大起大落)   

역사상 중국의 인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기복을 보였다. 유럽이 중세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했으나 대체적으로 완만한 증가를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푸단대학( 旦大 ) 거젠슝(葛劍雄) 교수의《中國人口史》에 따르면, 전한(前漢) 말기 와 왕망의 난 중에 인구는 6,000만 명에서 3,500만 명, 후한 말기 삼국시대 대란으로 인구는 다시 6,000만 명에서 2,300만 명, 수/당(隋唐) 교체기 대란으로 6,000만 명에서 2,500만 명, 안녹산의 난 이후 5대 10국의 계속된 전쟁으로 인구는 7,000만 명에서 북송 초기 3,540만 명, 송/원교체기 대란으로 1억 4,500만 명에서 7,500만 명, 원/명(元明) 교체기 9,000만 명에서 7,160만 명, 명/청(明淸) 교체기 대란으로 인구는 근 2억 명 에서 1억 5,000만 명, 태평천국 전쟁이 발생한 청말 함풍제, 동치제 때의 대란으로 4억 3,600만 명에서 3억 6,400만 명으로 감소했다. 

칭화대학 진휘(秦暉) 교수는 역사상 중국의 인구 급감은 왕조 교체기의 전란에 따른 인화(人禍)라고 지적했다. 소빙하기(小氷河期) 같은 기후 변화와 역병, 전란이 동시다발로 일어났기 때문이지만, 이 같은 대규모 도살은 유럽인들의 신대륙 정복이외에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각국의 병력은 합계 3,500만 명이었으나 진시황의 6국 통일시 1,000만 명, 초한(楚漢)전쟁 후 전한 (前漢) 초 500만 명으로 급감했다. 진(秦)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조(趙)나라 군사 40만 명을 생매장한 장평지전(長平之戰)은 참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한문제(漢文帝)와 경제(景帝)의 휴양생식(休養生息),무위이치(無爲而治)로 한무제 때 3,600만 명, 후한말 6,000만 명으로 인구가 늘어났으나, 왕망(王莽) 시기 농민반란으로 수십년간 2/3가 감소해 후한 광무제때 2,100만 명만 남았다. 후한말 인구는 5,648만 명으로 회복했으나, 황건적의 난과 삼국시대 전쟁으로 조조가 시에서 말한 대로 백골이 들에 널려있고 천리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白骨露于野, 千里無鷄鳴). 많은 지방이 무인지경으로 바뀌었고 서진(西晉)이 통일했을 때 위, 촉, 오 3국의 인구는 합쳐서 760만 명만 남아 6/7이 감소했다.

서진이 통일을 유지한 30여년 말년 인구는 1,600만 명으로 전한시대의 1/4에 불과했고, 팔왕지란(八王之亂)에 이은 오호난화(五胡亂華)로 4세기 북부 중국은 북방 민족에게 완전히 짓밟히었고 남부 중국은 제국을 통일할 능력이 없었다. 호한(胡漢) 혼혈왕조 수/당(隋唐)이 중국을 재통일해 수도 장안(長安)이 국제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였고 당나라 중기 당나라 인구는 5,291만 명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755년 안녹산의 난 이후 당(唐)은 100년 대란에 빠져 당나라 말기 인구는 1,692만 명으로 70% 감소했다. 몽골과 여진족의 침공은 계속된 겁난이었고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 같이 닭과 개도 남기지 않는 몰살(屠城) 기록이 많다. 

중국 인구는 청나라 건륭(乾隆) 중엽 이후 돌연 가속화되었는데, 이는 해외로부터 고구마, 감자, 옥수수 도입으로 식량 생산이 급증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 후 중국 인구는 순차적으로 1억, 2억, 3억을 초과해 함풍제 원년 1851년 4억 3216만 명에 달했다. 태평천국의 난 직후 1863년 중국 인구는 2억 3,000만명으로 거의 2억 명이 줄었으나, 신해혁명과 항일전쟁 시기 "사만만동포(四萬萬同胞)여 단결하자"라는 구호를 보면 다시 4억 명으로 급증하였다.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렇게 잔인했는지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중국문명의 분수령 : 주진지변(周秦之變)과 당송(唐宋)교체 

수천년 중 국역사에서 30년마다 한번 전란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고 대량의 유민(流民) 증가와 인구 이동을 수반했고, 사상과 제도 등 중국 문명 전반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중국사학자들은 중국 문명의 대변혁을 가져온 사건으로 진시황의 통일(周秦之變)과 당나라 중기 안녹산의 난(당/송 교체), 그리고 청말 서세동점을 들고 있다. 역대 왕조는 200-300년을 유지하지 못했고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었으나 진시황 이후 수천년 이어진 정치 제도는 황제 체제(帝制)이고 그 역사의 관성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루 아침에 황제가 바뀌고 귀족이 몰락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중국인들은 황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타인에 대해 극도로 무관심하고 아는 사람만 믿는 소위 꽌시(關係:인적 네트워크) 문화도 오랜 전란 속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8∼13세기 당/송 교체기는 중국 문명의 분수령이다. 안녹산의 난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은 당(唐) 초기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정신이 점차로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중국 중심의 내성적(內省的) 태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국민성이라는 것이 있는지 논란이 있지만 중국인 자신의 반성이든 외국인의 관찰이든 중국인의 인성과 소질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전란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사상과 제도의 영향도 크다는 것은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민족인 남북한이 생활수준은 물론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까지 천양지차로 다른 것은 제도를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현재의 중국도 어떤 각도에서 보든 정상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1천년 이래 중국이 사상이나 과학에서 인류에 공헌한 것이 있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특히 중국이 인류 문명이 가꿔온 보편적 가치를 부정, 배척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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