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인문기행12] 피난민 만남의 장소, 영도다리

관리자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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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만남의 장소, 영도다리 

김동현(17회·청조인 편집고문) 


영도다리는 한때 부산의 대표 브랜드였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부산에서는 “다리 아래서 너를 주워왔어. 말 안 들으면 다리에 도로 갖다 버린다” 는 놀림말을 듣지 않고 자란 어린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영도섬에서 나룻배를 통해 부산시내로 건너다니던 뱃길에 한쪽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최첨단 공법의 도개교(跳開橋)를 1934년 11월 23일 개통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영도에 조선소 터전을 마련했기에, 조선소 장비의 육로수송과 일본을 왕래하는 큰배들의 운항을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일제가 고안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이다. 일본 군수업체가 들어선 영도와 부산 본토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비는 요즘 돈으로 360억 원 정도 들었는데 일본 기업가들의 헌금도 적지 않았다. 

다리가 가설되기 전에는 영도 봉래동 갯가에서 용미산(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기슭을 오가는 나룻배가 유일한 운송수단이었으며 한창때는 하루 이용 승객이 5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 다리건설로 나룻배가 없어진 지 90년 후에 이번에는 관광용 도선이 다시 부활했다. 도선 출발지였던영도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 자갈치시장, 원양어선과 냉동창고, 조선소 수리공장, 깡깡이 예술마을을 샅샅이 돌아볼 수 있다. 

영도다리의 시공회사는토목계의 거두로 알려진 오바야시구미(大林組)가 맡았고 기계시설 부문은 오사카기차회사가 제작했다. 설계를 맡은야마모토 우타로(山本卯太郞)는 나고야공고를 거쳐 미국 유학을 마친 40대 초의 엘리트였으나 개통도 못보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보조설계는 통영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건축가 최규용씨. 4년 공사 끝에 준공식 때는 다리의 장수기원을 위해 김해에 살고 있던 80대 장수 부부와 쓰치야 덴사쿠(土屋傳作) 부산시장이 테이프 커팅을 했다.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은 축사를 통해 “부산 항은 조선반도의 인후(咽喉. 목구멍)이자 구아(歐亞. 구라파 와 아시아)의 현관으로 매우 중요한 사명을 갖고 있다. 오늘 개통을 맞아 교통, 산업, 경제 모든 부분에서 국운융창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개통식 인파 몰려 전차운행도 중단 

다리의 첫발을 내딛는 도초식(渡初式)은 부산의 각 소학교 3~4학년에서 선발된 280명이 부산과 영도 양쪽에서 동시 출발로 시작했다. 커다 란 강철 구조물이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도개교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이날 7만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인파에 밀려 동광동과 남포동 사이 전차운행도 한동안 정지되었다. 당시 부산인구가 16만 명 정도였으니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막보다 더 큰 구경거리였던게 분명하다. 거리가 어두워지자 다리 난간에는 만국기와 일장기가 펄럭이고 각종 축하 제등 행렬이 불바다를 이루었다. 

중앙도매시장에서는 준공을 위한 축하무대가 설치되어 남빈권번, 봉래권번, 녹정유곽에서 선발된 기생들의 화려한 가무가 공연되었으며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축하 행진곡’ 합창도 있었다. “부산대교 공사가 완성되어 기쁨은 거리에 넘쳐나고 / 개통식이 행해지는 오늘 같은 좋은 날을 자축하세”라는 축하노래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영도다리는 개통 당시 하루 7번 교각이 올라갔으나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1960년대 초에는 하루 2번 전차 안에서 15분 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영도다리는 32세가 되던 1966년 8월 31일 교통체증과 영도지역의 급수문제로 인해 도개기능을 중지했다가 47년만인 2013년 11월 27일 다시 부활했으며, 지금은 오후 2시 한차례만 통행이 정지되고 60도 각도로 다리 상판이 올라간다. 국내유일의 도개교인 영도대교는 순전히 관광을 위한 들림쇼인 것이다. 그나마 코로나 사태 동안은 도개장면이 당분간 멈추었다. 

8.15 광복 무렵 35만 명이던 부산 인구가 귀환동포 20만, 한국전쟁 때 50만이 넘는 피난민이 몰려들어 갑자기 포화상태가 되었다. 전국의 피난민들은 모두 다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면서 뿔뿔이 헤어졌기에 이곳은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운좋게 고향사람이라도 만나면 서로 부둥켜안고 부른 노래가 실향민들의 애창곡 ‘꿈에 본 내고향’이었다. 가마니와 미군 담요를 둘러친 한복남의 도미도레코드사 임시녹음실에서 함경도 나진 출신의 피난민 한정무가 1951년에 취입한 노래다. 전쟁의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한 소설가 박완서는 “1950년대 우리국민의 정서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전부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3년 눈물바다를 이룬 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캠페인의 원조는 바로 영도다리였다. 가족을 찾는 안내 쪽지가 방송국 빌딩을 도배했 듯이 당시에는 애달픈 사연들이 교각 난간을 가득 메웠다. 영도다리 아래 교각 주변에는 판잣집이 벌떼처럼 붙어 있어서 교하촌(橋下村)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피난민들은 낯설고 힘든 객지생활 속에서도 가족상봉의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틈만 나면 영도다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다리 아래에 유난히 점 집이 많았던 것은 언제쯤 상봉할지, 가족은 살아있는지, 초조해진 마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전성기에는 영도다리 아래 점집이 120곳이나 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명맥을 지킨 집은 ‘소문난 대구점집’이었다. 지금은 영도대교 아래 유라리광장에 점바치골목 기념관이 있다.


힘든 피난살이에 자살다리로 오명 

객지에서 무척이나 힘들고 지친 피난민들은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많을 때는 하루 27명이 투신하여 ‘자살 다리’라는 오명을 얻기도했다. 자살방지를 위해 ‘잠깐만!’을 곳곳에 붙였다. 외로움과 생활고로 시작한 자살이 강력한 단속으로 잠잠해지더니 막상 한 많은 피난살이가 끝나고 휴전이 되자 다시 늘기 시작했다. 힘든 타향살이기는 했지만 부산생활 3년에 정이 들고 젊은이들은 사랑도 영글어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도다리 뿐만 아니라 태종대에도 청춘남녀의 동반자살이 일어나곤 했다. 

서울 환도를 며칠 앞두고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유호가 자갈치시장에서 술잔을 나누면서 마음을 합해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해질 무렵 출발하면 다음날 아침 서울에 도착하는 12번 열차에 피난민 애인을 떠나보내는 부산아가씨의 비통한 마음을 담아낸 이 노래는가수 남인수의 절창으로 음반이 10만장이나 팔렸다. 이처럼 경부선을 테마로 한 노래는 ‘달리는 경부선(최갑석)’,‘울리는 야간열차(반 야월)’,‘경부선 밤열차(명국한)’,‘비오는 부산역(김창옥)’ 등 30여곡에 이른다. 

지금은 영도다리 아래에 세워진 피난민 모습의 가족 동상에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 재이~’라고 부산 사투리가 새겨져 있다 . 오늘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7개국 중 자살 1위국이 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장소인 마포대교에는 ‘여보게 친구야,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게나’라고 새겨진 자살 예방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영도경찰서 소속의 영도다리 초소는 수영을 잘하는 경찰관들이 비상대기하면서 근무하는 자살방지 특공대였다. 1960년대초까지 10년간 영도 경찰서에 근무했던 박을룡 경사는 수영의 달인이라 3백 번 이상 바다에 뛰어들었으며 그가 구출한 사람만도 248명이라는 신문기사가 있다.

 

언젠가 초원복집에서 ‘이번에 YS가 대통령이 안되면 우리 모두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는 밀담이 정치파장을 일으켰지만, ‘영도다리에 가서 죽어라’는 말은 부산에서는 너무나 귀에 익은 소리다. 

다리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는 나루를 건넌다고 해서 도진교(渡津橋)로 시작했다가 여러 이름을 거쳐 지금은 영도대교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장 친숙한 이름은 영도 출신 가수 현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오는 영도다리이다. 그의 노래비와 동상이 영도다리옆에 세워져 있다. 

영도는 신석기시대의 동삼동 패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으로 추정되며 태종대, 봉래산, 감지해변 산책로 등 아름다운 경관이 많아 영도8경으로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첨단 해양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부산은 육로의 교통체증을 막기 위해 바다 위를 달리는 다리가 유난히 많은 편이다. 영도대교, 광안대교, 부산항대교, 남항대교, 을숙도대교, 신호대교, 가덕대교 등 7개 다리를 관광상품화하는 ‘세븐 브릿지 랜드마크’를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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