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
- 의지, 양심, 사랑 그리고 권력에 대하여 -
정순영 (25회·전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
태초에 하느님(神)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자신의 형상으로 빚었으므로(그러므로 처음부터 인간의 오만이 예기되었다고도 한다)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설과 형상만 주었으므로 그의 영혼은 복종의지에 놓였다고 하는 두 주장이 소위 창조설에서도 다시 세부 논란영역으로 다투고 있지만 인간을 처음부터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에는 우선 ‘의지’라는 것이 있다.(의지의 본질을 플라톤은 이성과 감정과 또 다른 본성이라고 얼버무렸는데 많은 연구 끝에 이는 둘 사이를 오가면서 이성을 보완하거나 감정을 조절하는 알 수 없는 심적 에너지라고 하였고 최근 뇌과학에서도 유사한 연구결과를 밝혀내고 있다)
철학, 종교, 도덕의 탄생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자손이 번창하여 먹거리와 잘거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해지고 번창을 위한 짝거리의 적정 배분에 문제가 생겨 소위 약탈과 전쟁, 폭력과 살육이 횡행하여 이를 두고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버릇이 생기면서 철학이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에 원래 스스로 생로병사하는 자연적 문제에 대해 인간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해결을 위하여 길을 찾다가 불가해한 자연현상에 외경심을 가지고 신봉해 왔던 과거의 미신(원시종교)에서 좀 더 개량된 형태의 깨달음이 생기면서 이른바 종교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별개로 먹거리, 잘거리, 짝거리의 해결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서로 해결해야 하므로 ‘모두 그리고 각자’가 따라야 될 규범이 있어야 함을 깨달으면서 도덕의 등장을 보게 된다. 야스퍼스와 암스트롱이 말하 는 B.C. 8~3세기 ‘축의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세월이 자꾸 흘러가면서 철학과 종교 그리고 도덕은 모두 함께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양심’이다. 철학의 비조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할 때, 수많은 종교적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도달하여 남긴 말들 중 압권인 석가와 그의 제자들이 ‘네 마음이 부처다’라고 할 때, 예수가 ‘하나님은 네 마음에 있다’라고 할 때, 그리고 예수의 본래 뜻을 왜곡하여 종교국가를 이룩하고 인간의 삶을 강퍅하게 만들어 온 중세 암흑시대의 마감을 예상한 서구 15세기 종교개혁의 선각자인 후스가 화형으로 죽으면서 남긴 말 ‘진리는 네 마음에 있다’라고 할 때 그 양심을두고 한 말이다.
도덕의 핵심은 양심
또 공자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라고 하면서 황금률을 설파하고 18세기 칸트가 나타나서 그 황금률을 ‘네가 하고자 하는 마음의 명령을 네 이웃에게도 보편적 절대명제가 되게 하라’고 똑같이 제창하면서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에 박힌 도덕률’ 이라고 멋지게 표현할 때 그 도덕의 핵심도 역시 ‘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인간의 마음속에 생긴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탐구로 들어가 찾아낸 보물이고 성배였다. ‘네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다’라고 하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되는 그런 세상만 만들면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될 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의 시대에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현자들의 깨달음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자초한 전쟁과 살육의 참혹한 대참사는 끊이지 않았다. 이 결과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해결될 수 없는, 그렇다고 신의 의지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거부하는 계몽시대의 끝물에 나타난 철학자 헤겔과 마르크스는 신을 쫓아내고 신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내세운 소위 ‘이성’의 간지(奸智) 또는 ‘역사’의 간지라고 하였다. 양심은 어느덧 이성과 역사로 맘대로 멋대로 훼손되고 오용되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역사에는 ‘양심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또 다른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지배복종을 강요한 서양의 기독교 종교국가와 동양의 유학 도덕국가(조선의 성리학 도덕국가를 포함하여)에서 장기간 활용해 온 것이 있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랑’(또는 仁과 慈悲)이다.
양심의 또 다른 이름 - 사랑
사랑의 본질은 오랫동안 ‘나누고 배려하는’ 속성으로 에로스나 아가페 등처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달라질 수 없는 영원불변한 진리 그 자체가 되었다. 사랑이 그렇게 순도 높은 양심의 다른 이름으로 수긍되면서 80세 된 괴테가 16세 처녀의 부친에게 딸을 달라고 해도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고 흔히 ‘양심도 없는 노인’이란 핀잔은 커녕 애련(愛憐)한 낭만주의 문학 표현의 에피소드로 남은 것이리라. 그리고 기어코 20세기까지 와서 벌어진 제1, 2차 세계 대전이 축의 시대에 있었던 참혹한 전쟁과 살육을 다시금 재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축의 시대에 발견한 양심과사랑은 20세기 말까지도 그 본질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양심도 사랑도 갑자기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변화가 나타나고 니체가 제창한 ‘도덕적 상대주의’ 또는 ‘상대적 도덕성’이 더욱 힘을 얻으면서 일단 종교에서 신을 축출하고 대타로 내세운 이성마저 쫓아 내면서 소위 ‘탈근대(Post-Modern)’ 세상이라는 커다란 혁명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양심과 사랑을 쫓아낸 도덕적 상대주의 광풍
그것은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말한 ‘신이여 악마와 함께 영원하길’에서 은유했듯이 사랑이 스스로 또 다르게 배태하고 있었던 ‘소유하고 강제하는’ 속성이 여지없이 나타나면서 마침내 성폭력과 미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나타났고 이들은 고아한 사랑의 속성을 희롱하다 못해 양심마저 저잣거리의 광대놀음 속에 던지는 도덕 상대주의 광풍이 일어 나고있다.
세계가 그렇게 강한 돌개바람과 쓰나미의 문명파괴가 일 어나고 있는데 그 세계의 전위병처럼 씩씩하게 앞장서온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 없고 오히려 더 뒤틀린 현상으로 ‘뗏법과 ‘국민 정서주의’ 그리고 최근의 ‘내로남불’은 한국 정치사회 현상의 특징으로 고착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물론 동서양이 함께 지금까지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회의(懷疑)와 해석을 해야 하고 다시 깨달음과 지혜를 모아 새로운 문명사와 지성사를 쓸 때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의지’와 ‘양심’과 ‘사랑’이 인간을, 사회와 국가를, 그리고 역사를 움직여왔는지 살펴봤는데 그것이 다일까?
허무주의 속을 휘젓는 권력
다시 돌아가 보자면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의지(자유 의지인지 아닌지는 계속 알 수 없지만)를 주면서 양심도 사랑도 함께 주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인간과 역사에서 현시되고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상과 인간의 움직임은 양심을 목적으로, 의지를 수단으로, 그리고 사랑이 양자를 잇는 교량으로 작용하였음이 맞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셋을 ‘각자 그리고 더불 어’라고 마냥 해석하고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설명이 되지 않는 빠진 것이 있을 법하다. 무엇일까?
바로 권력이다. 니체는 이 세상이 자본주의의 극대화로 인간은 영혼이 빠져 나간 채 아무런 활력도 소생의 기미도 없는 허무주의 세계로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도덕적 상대주의 도래 주장은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 백 년을 내다보면서 예언같이 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후 도덕과 윤리학자 그리고 종교학자들이 마치 그의 예언을 하나하나 확인이라도 하듯이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검증해 왔는데 불행히도 거의 맞아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허무주의 세계에 판을 치는 것은 말초신경적인 예능이 자본주의의 논리와 더욱 결탁하든지(최근 ‘오징어게임’과 ‘지옥’이 전 세계적 각광을 받는 것을 보라) 아예 그런 세상이 말세라고 보면서 우리라도 정신을 차리자는 식의 전체주의 벽을 쌓든지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고 실제 그런 세상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가. 이제 사이비 종교가들이 아니라도 말세가 예견되고 또 지구환경이 악화되기 전에 미증유의 불상사가인간사회에서 보다 먼저 현실화될 조짐이다.
※ 신년 특별기고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의 후속편(권력의 본질에 대한 연구)은 2월호에 이어집니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
- 의지, 양심, 사랑 그리고 권력에 대하여 -
정순영 (25회·전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
태초에 하느님(神)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자신의 형상으로 빚었으므로(그러므로 처음부터 인간의 오만이 예기되었다고도 한다)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설과 형상만 주었으므로 그의 영혼은 복종의지에 놓였다고 하는 두 주장이 소위 창조설에서도 다시 세부 논란영역으로 다투고 있지만 인간을 처음부터 움직이게 하는 동인(動因)에는 우선 ‘의지’라는 것이 있다.(의지의 본질을 플라톤은 이성과 감정과 또 다른 본성이라고 얼버무렸는데 많은 연구 끝에 이는 둘 사이를 오가면서 이성을 보완하거나 감정을 조절하는 알 수 없는 심적 에너지라고 하였고 최근 뇌과학에서도 유사한 연구결과를 밝혀내고 있다)
철학, 종교, 도덕의 탄생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자손이 번창하여 먹거리와 잘거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해지고 번창을 위한 짝거리의 적정 배분에 문제가 생겨 소위 약탈과 전쟁, 폭력과 살육이 횡행하여 이를 두고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버릇이 생기면서 철학이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에 원래 스스로 생로병사하는 자연적 문제에 대해 인간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해결을 위하여 길을 찾다가 불가해한 자연현상에 외경심을 가지고 신봉해 왔던 과거의 미신(원시종교)에서 좀 더 개량된 형태의 깨달음이 생기면서 이른바 종교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별개로 먹거리, 잘거리, 짝거리의 해결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서로 해결해야 하므로 ‘모두 그리고 각자’가 따라야 될 규범이 있어야 함을 깨달으면서 도덕의 등장을 보게 된다. 야스퍼스와 암스트롱이 말하 는 B.C. 8~3세기 ‘축의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세월이 자꾸 흘러가면서 철학과 종교 그리고 도덕은 모두 함께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양심’이다. 철학의 비조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할 때, 수많은 종교적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도달하여 남긴 말들 중 압권인 석가와 그의 제자들이 ‘네 마음이 부처다’라고 할 때, 예수가 ‘하나님은 네 마음에 있다’라고 할 때, 그리고 예수의 본래 뜻을 왜곡하여 종교국가를 이룩하고 인간의 삶을 강퍅하게 만들어 온 중세 암흑시대의 마감을 예상한 서구 15세기 종교개혁의 선각자인 후스가 화형으로 죽으면서 남긴 말 ‘진리는 네 마음에 있다’라고 할 때 그 양심을두고 한 말이다.
도덕의 핵심은 양심
또 공자가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라고 하면서 황금률을 설파하고 18세기 칸트가 나타나서 그 황금률을 ‘네가 하고자 하는 마음의 명령을 네 이웃에게도 보편적 절대명제가 되게 하라’고 똑같이 제창하면서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에 박힌 도덕률’ 이라고 멋지게 표현할 때 그 도덕의 핵심도 역시 ‘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인간의 마음속에 생긴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탐구로 들어가 찾아낸 보물이고 성배였다. ‘네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다’라고 하면서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되는 그런 세상만 만들면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될 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축의 시대에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현자들의 깨달음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자초한 전쟁과 살육의 참혹한 대참사는 끊이지 않았다. 이 결과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해결될 수 없는, 그렇다고 신의 의지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거부하는 계몽시대의 끝물에 나타난 철학자 헤겔과 마르크스는 신을 쫓아내고 신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내세운 소위 ‘이성’의 간지(奸智) 또는 ‘역사’의 간지라고 하였다. 양심은 어느덧 이성과 역사로 맘대로 멋대로 훼손되고 오용되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역사에는 ‘양심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또 다른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지배복종을 강요한 서양의 기독교 종교국가와 동양의 유학 도덕국가(조선의 성리학 도덕국가를 포함하여)에서 장기간 활용해 온 것이 있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랑’(또는 仁과 慈悲)이다.
양심의 또 다른 이름 - 사랑
사랑의 본질은 오랫동안 ‘나누고 배려하는’ 속성으로 에로스나 아가페 등처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달라질 수 없는 영원불변한 진리 그 자체가 되었다. 사랑이 그렇게 순도 높은 양심의 다른 이름으로 수긍되면서 80세 된 괴테가 16세 처녀의 부친에게 딸을 달라고 해도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고 흔히 ‘양심도 없는 노인’이란 핀잔은 커녕 애련(愛憐)한 낭만주의 문학 표현의 에피소드로 남은 것이리라. 그리고 기어코 20세기까지 와서 벌어진 제1, 2차 세계 대전이 축의 시대에 있었던 참혹한 전쟁과 살육을 다시금 재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축의 시대에 발견한 양심과사랑은 20세기 말까지도 그 본질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양심도 사랑도 갑자기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변화가 나타나고 니체가 제창한 ‘도덕적 상대주의’ 또는 ‘상대적 도덕성’이 더욱 힘을 얻으면서 일단 종교에서 신을 축출하고 대타로 내세운 이성마저 쫓아 내면서 소위 ‘탈근대(Post-Modern)’ 세상이라는 커다란 혁명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양심과 사랑을 쫓아낸 도덕적 상대주의 광풍
그것은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말한 ‘신이여 악마와 함께 영원하길’에서 은유했듯이 사랑이 스스로 또 다르게 배태하고 있었던 ‘소유하고 강제하는’ 속성이 여지없이 나타나면서 마침내 성폭력과 미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나타났고 이들은 고아한 사랑의 속성을 희롱하다 못해 양심마저 저잣거리의 광대놀음 속에 던지는 도덕 상대주의 광풍이 일어 나고있다.
세계가 그렇게 강한 돌개바람과 쓰나미의 문명파괴가 일 어나고 있는데 그 세계의 전위병처럼 씩씩하게 앞장서온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 없고 오히려 더 뒤틀린 현상으로 ‘뗏법과 ‘국민 정서주의’ 그리고 최근의 ‘내로남불’은 한국 정치사회 현상의 특징으로 고착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물론 동서양이 함께 지금까지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회의(懷疑)와 해석을 해야 하고 다시 깨달음과 지혜를 모아 새로운 문명사와 지성사를 쓸 때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의지’와 ‘양심’과 ‘사랑’이 인간을, 사회와 국가를, 그리고 역사를 움직여왔는지 살펴봤는데 그것이 다일까?
허무주의 속을 휘젓는 권력
다시 돌아가 보자면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에게 의지(자유 의지인지 아닌지는 계속 알 수 없지만)를 주면서 양심도 사랑도 함께 주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인간과 역사에서 현시되고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상과 인간의 움직임은 양심을 목적으로, 의지를 수단으로, 그리고 사랑이 양자를 잇는 교량으로 작용하였음이 맞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셋을 ‘각자 그리고 더불 어’라고 마냥 해석하고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설명이 되지 않는 빠진 것이 있을 법하다. 무엇일까?
바로 권력이다. 니체는 이 세상이 자본주의의 극대화로 인간은 영혼이 빠져 나간 채 아무런 활력도 소생의 기미도 없는 허무주의 세계로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도덕적 상대주의 도래 주장은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 백 년을 내다보면서 예언같이 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후 도덕과 윤리학자 그리고 종교학자들이 마치 그의 예언을 하나하나 확인이라도 하듯이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검증해 왔는데 불행히도 거의 맞아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허무주의 세계에 판을 치는 것은 말초신경적인 예능이 자본주의의 논리와 더욱 결탁하든지(최근 ‘오징어게임’과 ‘지옥’이 전 세계적 각광을 받는 것을 보라) 아예 그런 세상이 말세라고 보면서 우리라도 정신을 차리자는 식의 전체주의 벽을 쌓든지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고 실제 그런 세상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가. 이제 사이비 종교가들이 아니라도 말세가 예견되고 또 지구환경이 악화되기 전에 미증유의 불상사가인간사회에서 보다 먼저 현실화될 조짐이다.
※ 신년 특별기고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의 후속편(권력의 본질에 대한 연구)은 2월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