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인문기행 부산인문기행 ⒃(끝)] 자갈치 아지매

관리자
202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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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아지매 

김동현(17회·청조인 편집고문) 


부산하면 무엇보다도 자갈치시장이 떠오른다. 비가 오면 대신동의 구덕산 돌멩이들이 보수천을 거쳐 해안가로 쏟아져 내려오는 지역이라고 해서 원래 지명은 자갈처였다. 일제 때는 일본인들만의 전용 물놀이 장소인 남빈(南濱)해수욕장 자리다. 남포동에서 부평동, 완월동에 이르는 해안에는 몽돌과 모래밭이 많아 일제가 매축하면서 해수욕장을 조성했던 것이다. 

6.25 전란으로 동쪽의 국제시장은 도떼기시장으로, 서쪽의 부평시장은 깡통시장으로 바뀌면서 전통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자갈처에 와서 함지박이나 판때기를 펼쳐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자갈마당에서 널빤지 좌대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팔았기에 ‘판때기 아지매’로 통했다. 근처 충무동에 생어상조합(生漁商組合)이 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어시장이 형성되었고, 생선이름에 많이 등장하는 ‘치’를 붙여서 자갈치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자갈치 마당에서 생선이 아니라 장작, 솔가지, 솔방울 등 땔감이 주종을 이루었다. 자갈밭에 땔감을 담장처럼 수북이 쌓아두고 그 속에서는 은밀히 밀수품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한려수도에 해당하는 부산, 통영, 삼천포, 여수는 한때 밀수의 황금바다였다. 이 무렵부터 “영도 부자는 밀수 부자”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우리나라 외화 획득의 일등공신이 원양어업이었을 때는 오랜 항해에 시달리던 뱃사람들이 조그만 통선을 타고 도착하는 부두가 바로 자갈치시장이었다. 부산은 입출항의 기지여서 파시(波市)처럼 술집과 여인숙도 즐비하고 흥청거렸다. 원양어선이 감천동 원양부두로 옮긴 후에도 한동안 마도로스(matroos)들은 이곳 자갈치에 와서 애환을 달랬다.

‘자갈치 아지매’는 억척스러우면서도 정겨움이 넘치는 시장 아주머니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 초 단속 나온 경찰관의 목을 껴안고 바다에 뛰어든 일이 있고난 후 자갈치 아지매들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부산 새벽을 깨우는 자갈치 아지매

“부산 새벽은 자갈치 아지매가 깨운다.”는 말이 있다.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 택시 첫 손님은 항상 자갈치 아지매들이었다. 자갈치시장 근처에 공동어시장 경매가 6시부터 시작되지만 자갈치 아지매들은 전날 어황 사정을 파악하고 5시에 가게 문을 열기에 새벽 인생으로 살아간다. 

부산 출신 가수 나훈아의 노래 <자갈치 아지매>에는 “입술을 깨물면서 뱃고동은 반평생 / 해와 달이 바뀌어 이마의 주름살을 쳐다보며 쏟아지는 눈물도/ 한 맺힌 인생살이 갈매기 손길 따라/ 이제는 억척스런 자갈치 아지매/ 어서 어서 오이소 웃음으로 반기는/ 부산의 자갈치 아지매”라는 가사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대 어업전진기지인 남부민동 남항에 있는 부산공동어시장은 국내 수산물의 30% 이상을 위탁판매하는 최대 어시장이다. 이곳 경매장은 쉴 새 없이 흥정을 붙이는 경매사, 더 좋은 물건을 보다 싸게 사려는 중도매인, 실제 장사를 하는 가게주인 소매상, 경매된 생선을 손수레에 옮겨 싣는 인부, 배에서 내린 생선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부녀반, 여기에 구경꾼들까지 곁들여 억센 사투리와 고성이 오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혹시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새벽 경매어시장으로 나가면 분명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갈치 아지매가 자갈치 할매로 바뀔 때쯤 되면 모든어패류와 생선을 훤히 꿰뚫고 있는 수산학 박사가 된다. 바닷바람에 피부는 거칠어지고 짠물에 손가락 지문이 모두 사라져 버린 억척스런 삶을 헤쳐 온 자갈치 아지매들은 모두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부산에서 그런 대로 행세를 하는 집안은 늦가을 김장철이 되면 자갈치시장에서 대구를 여러 두름 사다가 알은 소금에 절이고, 내장은 국을 끓이며, 나머지 살 생선은 처마 밑에 걸어 말렸다. 밤이 되면 대구 눈에서 뿜어내는 푸른 불빛을 바라보면서 해풍에 꾸들꾸들해진 살점을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새벽녘에는 다시 자갈치로 가서 복국이나 재첩국으로 해장을 하곤 했다. 

자갈치시장은 충무동 부산공동어시장부터 영도대교 바로 옆 건어물시장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수산물시장이다. 1985년 대화재로 자갈치시장의 점포 231개가 모두 잿더미로 변했으며 그 자리에 지하2층, 지상7층의 현대식 건물이 새롭게 들어서고 외국 관광객들도 몰려오지만, 자갈치시장의 진면목은 골목 양편의 천막이나 좌판에 앉아 손님을 부르는 아지매들의 억센 사투리가 아닐까 싶다. 자갈치시장 생선은 ‘살아 있으면 1만 원이고, 죽으면 5천 원, 소금을 뿌렸으면 3천 원, 밤늦게는 거저’라 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최대 수산물 축제인 자갈치 축제의 슬로건은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이다. 축제가 열리는 유라리 광장에서는 자갈치 아지매들이 세계 최대의 회 비빔밥 3천인 분을 만들고 미역국, 전복죽, 복국 등을 끓여서 축제기간 동안 방문객들에게 제공한다. 자갈치시장은 수산물로만 유명한 곳이 아니라, 정감 넘치는 부산 사투리의 보물창고이다.



김민부 동문이 창안한 ‘자갈치 아지매’는 최장수 프로 

소주라도 한 잔 걸치고 자갈치시장 건물 뒤편 친수광장으로 나가서 건너편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을 보면“그때 왜 그랬어요?”라는 글자가 밤하늘에 선명하게 보인다. 머리칼이 반백의 나이가 되어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세 가지, 즉 ‘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이 떠오르며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노전(路廛)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고함소리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다정하면서 억센 부산 사투리가 매일 아침방송에 살아있다. 부산 MBC 라디오의 “안녕하십니꺼, 자갈치 아지맵니더.”로 시작하는 <자갈치 아지매>는 1964년 6월 7일 첫 방송을 시작했으며 2022년 3월 15일 현재 17,848회로 우리나라 최장수 시사만평 프로그램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이 프로를 창안한 김민부 PD는 ‘한국의 랭보’로 알려진 천재 시인이다. “일출봉에 해뜨거든….”으로 시작하는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이기도 한 김민부는 성남초등학교를 2회 월반하고 부산 지역 중학 연합고사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며 부산고등학교 다닐 때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면서고교 2학년 때 시집『항아리』를 냈다. 

부산시가 편찬한『부산을 사랑한 사람들』의 첫 번째 인물로 소개된 김민부는 31세 때 화재로 요절했다. 그의 시비는 암남공원 해안길에 있으며, 산복도로 초량 이바구길에 있는 ‘김민부 전망대’에서는 부산의 일출을 즐길 수 있다.


깡깡이 아지매의 애환 

자갈치 아지매보다 고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은 깡깡이 아지매이다. 오랜 항해로 선박 표면에 붙어 있는 녹이나 조개 등 이물질을 망치로 깡깡 두드려 제거하는 일을 깡깡이라고 한다. 주로 여인들이 뱃전에 밧줄로 몸을 매달고 종일 두드리다 보면 난청 에 이명이 겹쳐 불면증에 시달린다. 

‘부산에 가서 깡깡이질이나 해보세’라는 노랫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영도에는 낡은 배를 수선하는 깡깡이 직업이 있었던 것 같다. 깡깡이는 제주에서 부산으로 이주해온 해녀들이 수중의 위험한 물질 대신 고되지만 해상에서 선박을 수리하는 일로 전업한데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화기 단발령으로 상투를 틀지 못하게 되자 말총으로 갓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제주민들이 섬을 탈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는 제주 해녀(海女)들이 부산으로 이주한 사연과 “저승에서 돈을 벌어 이승에 쓴다.”는해녀들의 고달픈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부산에는 제주 다음으로 해녀가 많다. 2020년 2월 통계로 847명이나 된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이며 미역과 멸치로 유명한 기장에서 해녀들의 ‘휘~ 휘~’하는 숨비소리가 가장 많이 들린다. 

어쨌든 깡깡이 아지매는 피난시절의 억척스럽고 모진 생활을 견뎌낸 우리 어머니들의 상징이다. 조선산업의 유산과 그 스토리를 이바구길에 녹여낸 깡깡이 예술마을이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문화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평동 수리조선소길 일대가 도시재생사업으로 깡깡이 투어코스가 되었다.   


※ 그동안 연재해왔던 <부산인문기행>은 『 천일의 수도, 부산』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기에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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