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인문기행-9] 영화산업의 메카-부산

관리자
202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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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의 메카-부산 

김동현(17회·청조인 편집고문)


오늘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의 깐느’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 5대영화제로 부상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에서 탄생한 영화가 일본을 거쳐 맨 처음 부산에서 상영됨으로써 한반도에 상륙했다. 개항과 함께 초량왜관이 일본 전관거류지로 바뀌고 6천여명이 거주하던 일본인 촌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행좌(幸座)가 1903년 광복동에 들어섰고 이어서 송정좌, 이듬해 부산좌가 개관되었다. 

초기에는 극장에서 영화 상영과 일본 전통극 가부끼(歌舞伎) 공연을 번갈아 했 다. 좌(座)는 다다미 바닥에 앉아 관람하는 장소를 말한다. 영화의 원래 이름인 모션 픽쳐(motion picture)를 번역한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영화 ‘기생충’으로 2020년 아카데미 4관왕이 된 봉준호 감독이 ‘한국영화 100년의 축복’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힌 것은 1919년 10월 27 일단성사서 상연된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한국인들이 만든 최초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계모의 학대를 받은 주인공이 정의로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연극이 주종이고 무대에서 표현할 수 없는 야외장면을 10분 정도 영화로 보완한 연쇄극(키노드라마)이므로 진정한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일본 작품이기는 해도 영화를 제일 먼저 상영한 곳이 부산이고, 국내에서 영화를 제일 먼저 관람한 사람도 아마 부산사람들일 것이다. 


최초의 영화 제작사·영화제 

동경유학생 출신인 이경손, 김정원 등이 1924년 7월 일본인 기업인들의 출자를 받아 설립한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출범한 곳도 부산 대청동이다. 일본인 다카사 간조(高佐貫長)가 왕필열이라는 한국명으로 감독을 맡고 이경손이 조감독으로 제작한 첫 작품 ‘해(海)의 비곡(悲曲)’에서 단역인 가마꾼으로 나온 배우지망생 나운규가 후에 조선 영화계의 대부가 되었다.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으나 이복남매라는 사실이밝혀져바다에 함께 투신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촬영은 대부분 부산서 이뤄졌고 제주도에 원정 로케이션을 하기도 했다. 영화의 주연을 맡은 초량 출신의 이주경은 부산 야구팀의 대표 투수를 거쳐 경남은행에 재직 중이었던 다재다능한 청년이었다. 이 영화는 1924년 11월 12일 서울 단성사서 개봉되었다. 

우리나라 영화제가 최초로 출범한 곳도 부산이다. 1962년 문화부가 주관한 대종영화상이나 1963년 조선일보의 청룡영화상, 1965년 한국일보의 한국연극영화 예술상이 태동하지도 않았을 때인 1958년 3월 27일 부산 국제극장에서 부산일보 주최의 제1회 부일영화상 시상식이 거행된 것이다. 이날 부일영화상 작품상은 영화 ‘잃어버린 청춘’이, 감독상은 유현목, 남녀주연상은 ‘시집가는 날’의 김승호와 ‘실락원의 별’의 주증녀가 각각 받았다. 부산이 영화제의 발상지가 된 것은 영문학자이자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창립한 장갑상 교수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맺은 열매이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 

피란정부 시절 국민홍보영화를 관장하던 부산 영주동의 국방부 정훈국이 휴전협정후 서울 필동 한국인마을쪽으로 옮겨감으로써 한국영화의 메카인 ‘충무로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의 작가 한진원씨가 오스카 각본상 트로피를 들고서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한국영화 원적지는 부산이다. 1910년대 광복동의 행좌와 태평관, 부평동의 부산좌, 보래관 등 유명 극장이 있던 부산 남포동 중심가에서 1996년 9월 13일 밤 문정수 부산광역시장이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선언했다. 

27개국 170여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던 부산의 첫 국제영화제에서 부산영화의 메카인 남포동 극장가를 ‘BIFF(Busan InternationalFilm Festival)광장’으로 명명하고 거리에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을 새겨두었다. 깐느나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유수영화제가 중장년층 관객인데 비해, 부산 남포동의 국제영화제는 20대 전후의 젊은 층이 주류여서 해외언론들 은 부산영화제를 ‘젊은 영화제’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산영화제는 경쟁과 심사를 하지 않는 비경쟁부분이 특징이지만, 독창성과 예술성을 기준으로 심사하는 뉴커런츠상을 통해 신인감독들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영화 기획단계의 프로젝트 마켓에 주력함으로써 젊은 영화인들의 관심이 무척 많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면 국내외 영화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어 ‘영화의 바다’에 흠뻑 빠져든다. 베니스나 깐느 등 유명 영화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영화뿐만 아니라 휴양 도시의 매력을 겸비하고 있는데 부산도 휴양지 매력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범일동 트리오 극장 

범일동에는삼일, 삼성, 보림극장이 트리오를 이루며 반세기 동안 또 다른 부산의 영화거리를 만들었다. 1955년 남포동에서 출발한 보림극장은 1968년 범일동으로 옮기면서 1,734석의 대형극장으로 변해 대형 공연장으로 인기가 높았다. 영화 ‘친구’에도 등장하는 삼일극장은 일제 말기인 1944년초에개장했으며 6.25 때는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이 트리오 극장은 시내의 개봉관과는 달리 2본 동시상영이나 19금 영화를 값싸게 볼 수 있는 삼류극장이라 가난한 학생들이 단속을 피해 가슴조이며 찾던 곳이다. 특히 부산진구와 동구에 국제고무, 삼화고무 공장이 들어섬으로써 이들 극장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유일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부산은 1999년 아시아 최초로 부산영상위원회를 설립하여 촬영지 교섭, 장비와 스튜디오 대여, 펀드 조성 등 영화제작에 관한 모든 업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영상위원회 덕분에 2000년에는 한국영화의 40% 이상이 부산서 촬영되었다. 2019년말까지 부산영상위원회는 1,300여 편의 영화 및 영상 제작을 지원했다. 


유네스코 영화창의도시 지정 

부산은 영화적 상상력과 다양성, 역동성이 넘쳐나기에 2014년 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영화창의도시로 지정되었다. 2021년 3월 부산은 로마나 시드니 등 18 개 영화창의도시 가운데 부의장 도시로 선정되었다. 부산은 영화 관련 인프라 뿐만 아니라 송강호, 문소리 같은 일류 배우와 곽경택, 윤제균 감독을 배출한 도시다. 실제로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고신대 의과대를 다닌 곽경택 감독의 2001년 영화 ‘친구’가 크게 흥행하면서부터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마이 뭇다 아이가 고마해라”와 같은 부산 사투리가 회자되면서 유사 작품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도시 부산을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상징은 40계단 옆에 있는 모퉁이 극장이다. 독일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의 로맨틱 코미디 흑백영화 ‘모퉁이 가게’에서 이름을 가져온 모퉁이 극장은 상영관 보다 영화 애호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활동이 더 돋보인다. 해운대 센텀시티에는 영화의 도시 부산의 아이콘으로 사 랑받고 있는 ‘영화의 전당’이 있다. 4천석의 야외극장을 비롯하여 하늘연극장, 중극장, 소극장, 시네마테크, 독립영화관 등을 갖춘 영상복합문화공간인 영화의 전당은 해체주의 미학을 살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한쪽 끝만 고정되어 있어서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 캔틸레버(Cantilever) 지붕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여기에 다양한 영화체험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의 ‘월드시네마 랜드마크’가 2021년 완공되면 영화창의도시인 부산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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