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인문기행-8] 부산, 아픔의 송출장

관리자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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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픔의 송출장 

김동현(17회·청조인 편집고문)


일본이 레이와(令和) 시대 를 맞아 2024년 새롭게 발행되는 1만엔권 지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새롭게 부설하는 경부철도주식회사 사장이었으며, 지금의 서울역인 한성 남대문역에서 열린 경부선 개통 축사에서 “철도는 문명 개화와 산업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밝혔다. 그러나 그도 한반도 침탈에 앞장 섰다. 일제의 철도 건설은 침략과 개발의 두 얼굴을 지닌 근대화의 산물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하는데 철도가 크게 기여하기도했다. 3.1운동 후부터 조선인의 이동을 감시하기 시작하면서 연락선을 타려면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도항증은 신분을 확인하는 여권과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불령선인을 가려내기 위한 제도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노동자들에게는 큰 걸림돌이었다. 막상 부산까지 와서 도항길이 막혀 버린 절박한 노동자들을 노리는 사기꾼들이 부두 주변에 득실거렸다. 1935년 순수 문예잡지 ‘조선 문단’ 4월호에 발표한 이남원의 소설 <부산>에서 브로커에게 사기당한 주인공이 일본행 대신 만주에 막일꾼으로 끌려가면서 “부산은 양심없는 마굴이자 썩어가는 인간 지옥이다”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실제로 부산의 유지들은 4천여명에 이르는 도항 대기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금도 하고 중앙정부에 대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맥 

‘여객선’이 아니라 ‘연락선’이라고 한 것은 승객이 아니라 전쟁 물자 연결 수송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다. 증기선 잇키마루호가 부산서 11시간 30분 운항하여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 동경까지 철도로 연결되고 부산에서는 경부선과 경의선을 거쳐 만주와 시베리아, 유라시아로 연결되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맥이 구축된 것이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는 1936년 경부선 복선 공사가 시작되어 1944년 10월에 완공되었으며, 부산진에서 출발하는 동해남부선은 1930년 7월에 착공하여 1935년 말에 개통되었다. 관부연락선의 운항 초기에는 연간 4만 명 정도가 연락선을 이용했으나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발동되고 나서는 광부, 부두 노동자, 학도병, 보국대, 여자 정신대 등 대규모 인력 송출 때문에 이용객이 3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1940년대는 관부연락선 외에도 부산과 하카다, 제주와 오사카, 여수와 시모노세키 등 새로운 연락선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1943년 10월 5일 밤 부산으로 오던 7,903톤급 곤론마루(崑崙丸)가 미 해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승객 544명이 침몰하는 사고가 난 이후 야간 운행이 금지되고 낮에도 수상 비행기의 엄호 아래 운항하였다.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1945년 3월부터는 관부연락선의 운항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경부선 개통에 따른 변화 

당시의 경부선은 요즘과 달리 부산이 시발점이었기에 부산서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를 하행선이라 하고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를 상행선이라고 불렀다. 기차와 연락선의 최종 목적지는 일본 동경이었기 때문에 동경행을 동상(東上)이라고 하고 조선에 오는 길을 귀선(歸鮮)이라고했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부산이 제2의 도시로 부상했으며, 우리 사회의 문화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남녀는 7살이 되면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유교의 가르침이 무너졌으며, 열차시각 때문에 시간에서 분(分)이라는 개념이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같은 돈을내고도 조선사람은 일본인보다 낮은 등급의 대우를 받는 차별의 공간이기도 했다. “3등 칸에 탄 조선 승객은 존재하지도 않는 4등 칸 손님 대우를 받는다”라는 일본 승객의 여행기도 있다. 부산 시내의 첫 철도는 경부선보다 4년 앞선 1901년 10월 초량과 구포 사이 16.6km 경철도였으며 그 후 일본인 주거지인 중앙동 부산해관까지 연장했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문명의 상징이 된 기차의 초창기 속도는 마차의 3배 정도인 시속 40km에 불과했지만, 당시 ‘독립 신문’은 “수레 속에 앉아 영창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고 기차 탑승소감을 게재하고 있다. 



서울역보다 완공이 앞선 부산역 

부산역 건물은 일본 국회 의사당과 동경역을 세운 일본의 대표 건축가 다쓰노 긴코 (辰野金吾)가 설계했으며 서울역과 한국은행 본점도 그의 작품이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외벽을 감싼 네오 르네상스식인 부산역사는 서울역보다 15년이나 앞선 1910년 10월에 완공되어 경부선 개통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현대식 역사(驛舍)이다. 1층은 역무실, 매표소, 개찰구, 대합실 등으로 쓰고 2층은 호텔과 고급식당이 있었다. 철도국이 운영한 부산철도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영호텔이다. 부산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첨탑 지붕에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드러난시계탑이었다. 부산역과 부산세관, 부산우편국은 부산의 3대 르네상스식 건물이었다. 중구 중앙동 4가 부산무역회관 자리에 있었던 부산역과 대청동 부산우체국 뒤편에 자리했던 부산우편국은 1953년 11월 대화재로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1910년 경 지어졌던 부산세관은 1980년 부산대교 건설에 따른 연안부두와의 연결을 위해 헐리고 말았다. 조선총독부 중앙청건물이 헐리면서 건물 꼭대기의 첨탑만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옮겼듯이 부산세관 첨탑도 새로운 집 부산세관 마당에 보관되어있다. 우리나라 해양경찰의 원조인 부산 수상경찰서가 1920년 초 부산 연안 터미널 근방에 신설되었다. 성능이 우수한 경비정도 갖추고 전국 해안의 경비와 어업 단속 및 해난 구조까지 담당할 정도로 그 위상이 대단했다. 이 수상경찰서의 서양식 건물도 부산세관처럼 부산대교 개설로 사라져버렸다. 



숱한 사연을 간직한 연락선 

경부철도와 관부연락선에는 한 많은 사연이 서려 있다. 3.1운동 직전인 2월 19일 일본여성으로 위장하여 허리띠에 춘원 이광수가 작성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감추고 왔던 김마리아, 볼모로 일본행을 택해야 했던 영친왕, 대마도 백작과 정략 결혼한 비운의 덕혜옹주, 쇼와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진 애국 단원 이봉창, 유학길에 올랐다가 일본 감옥에서 숨진 윤동주, 현해탄에 몸을 던진 성악가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 주인공 유태림 등도 이 길을 통해 일본을 왕래했다. ‘조선을 구할 미국 공주님’ 으로 행세하며 칙사 대접을 받았던 루즈벨트 대통령 딸 앨리스와 조선을 일본 지배하에 두기로 가쓰라 다로(桂 太郞)와 밀약한 윌리엄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도 특별열차편으로 부산에 와서 시모노세키행 배를 탔다. 이 밖에도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학도병이나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징용에 끌려갔던 길도 관부연락선이었기에 연락선을 ‘지옥선’이라 부르기도 했다. 


울며 헤진 부산항 

10대 소년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밑바닥의 공장생활을 경험했던 가수 남인수가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 보는/ 연락선 난간 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면서 애달프게 부른 ‘울며 헤진부산항’은 부산 송출장의 아픔을 대표하는 노래다. 또한 평양 화신상회 점원 출신인 장세정이 1937년에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슴 아픈 생이별을 노래한 국민 애창곡이었다. 부산은 그 이전에도 아픔의 송출장이었다.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아 유럽열강들이 일본 전국시대 각 영주들과 전쟁을 벌이고 배상조건으로 일본인들을 납치해서 노예나 용병으로 팔았는데, 꼭 100년후 임진왜란때는 조선인들을 노예로 대거 납치해간 곳이 부산항이었던 것이다. 


*잠시 쉬었던 부산인문기행이 9월호부터 다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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