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인문기행 ⑬ ] 피난민촌이 문화마을로

관리자
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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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촌이 문화마을로 

김동현(17회·청조인 편집고문) 


부산에서 최근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아미산 언덕배기에 있는 감천문화마을이다. 개항이후 일본인 들은 용두산 북녘자락인 복병산에 공동묘지를 설치했으나 1905년 북항개발을 위해 복병산 토석을 채굴해 나가자 묘지를 아미동으로 이전했다. 

1909년에는 영도와 부산진, 대신동에 있던 화장장마저 아 미동 산 19번지로 이장함으로써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의 감천마을은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죽어서나마 바다 건너 먼 고향을 바라보고 싶어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곳 언덕배기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인 유족들이 조상묘소 참배차 아미동을찾아오곤 했다. 2020년 11월 비석 마을의 도시재생사업 기초공사장에서 일본인 유골함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부산시는 조촐한 일본식 음식을 차려 놓고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몸 누일 자리가 없던 피난민들은 공 동묘지 위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묘지의 비석이나 상석은 주춧돌과 계단, 담장 등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이른바 산자와 죽은자가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아미동 비석마을이 형성된것이다. 

1957년 화장장이 당감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50년간 감천 동, 아미동 일대는 저승길이었다. 장례행사중 아미동 언덕에서 위령제를 지낼 때 까치들이 제사음식을 노리고 모여들었기 때문에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의 고개를 요즘도 '까치고개'라고한다. 

1955년 보수동에 본부가 있던 태극도 교도 800여 세대가 감천동으로 집단이주하면서 한때 이곳은 태극도 신앙촌이 되기도했다. 태극도 창시자인 조철제는 함안 칠성 출신으로 증산교 창시자인 강일순의 누이와 뜻을 같이하고 나서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했으며, 감천동 도인촌도 전성기에는 3천가구에 1만여 명의 교인이 거주했다. 그러나 1958년교조가 사망함에 따라 교단이 분리되고 교세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여기서 분가한 한 파벌의 박한경이 대순진리회 종단을 설립했다. 이곳에는 아직도 태극도 수련장이 보이는가 하면 교주의 무덤인 ‘할배 산소’도 그대로 있다. 


부산의 마추픽추 감천마을  

버려지다시피한 감천마을이 소생한 것은 2009년 문광부가 공모한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예술문화단체인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가 감천마을을 대상으로 응모한 ‘꿈꾸는 부산의마추픽추’가 당선되면서 부터이다. 2010년 부산시는 여기에다 ‘미로미로(美路迷路) 골목길’ 프로젝트를 추가함으로써 저소득층의 낙후된 주거지가 문화마을로 거듭난 것이다.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하는 영도의 ‘흰여울문화마을’도 전쟁의 상처를 딛고 아름답게 일어선 곳이다. 피난민으로, 도시개발로 밀려난 사람들이 산비탈에 움막을 지으면서 바 다로 문을 내어 답답한 가슴을 열었다. 하얀 미로의 골목을 끼고 게딱지같은 집들이 서로 등을 기대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간혹 파도와 바람이 대문을 두드린다. 감천문화마을과 흰여울마을은 관광지이면서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생활 터전이므로 현지 주민과 관광객이 어우러져 트레킹을 한다. 

일제가 건너편 송도를 유명 놀이터로 개발하여 번창해가 자, 송도보다 경관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영도 사람들은 이곳을 제2송도라고 하여 ‘이송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흰여울마을의 원래 지명이 이송도마을이다. 다달이 내던 수업료 월사금을 내지못한 가난한 피난민 학생 문재인이 학교 에서 쫓겨나 서성거리던 해변이 이송도이다. 

‘흰여울’은 봉래산 물길이 마을 절벽에 떨어지면서 해안 가 파도와 함께 흰 포말을 이룬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흰 여울길에는 맏머리 계단, 무지개 계단, 꼬막집 계단, 피아노 계단, 도돌이 계단 등 5개의 색다른 계단이 있어서 걷는 재 미가 쏠쏠하다. 

영선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절영해안길을 따라 피난민들 이 살던 성냥갑같던 집 옥상마다 이제는 아기자기한 카페를 마련하여 탁트인 바다의 절경을 즐기고 있다. 

이곳에는 바다를 반찬 삼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다. 파도소리와 갈매기소리 들으며 흰여울마을의 갈맷길 3구간을 걸으면 숨쉴 때마다 바다내음이 듬뿍 묻어온다. 

영화 ‘변호인’에서 돼지국밥집 아들 임시완의 집 하얀 외 벽에는 “니 변호사 맞재? 니 나 쫌 도와도”라고 송강호에게 애소하던 부산 출신 배우 故 김영애의 간절한 대사가 새겨져 있다. 

광복과 6.25를 계기로 50만 명에 가까운 귀환 동포와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천막을 치기 시작하자, 시당국은 산 중간의 배 부분에 길을 뚫어 산복도로(山腹道路)를 만들었 다. 원도심 부근의 산지 중턱을 지나는 산복도로는 부산진 구, 동구, 중구, 서구, 사하구, 사상구 등 6개 구를 아우르는 2만2천여km의 골목 비탈길이다. 

산복도로는 서민들의 애환이 겹겹이 쌓여 있는 부산 속의 부산이다. 부평초처럼 외롭게 떠돌던 사람들에게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만든 따뜻한 품이 산복도로였다. 가난하고 남루하기만 했던 골목길이 이제는 깨끗하게 단장되고 어두운 골목계단에는 웃음과 햇살이 가득 넘쳐난다. 집집마다 사연도 많던 산비탈의 판잣집들이 이제는 '이바구캠프'라는 어엿한 민박집으로 거듭났다. 


서민 애환 겹겹이 쌓인 산복도로 

개발에 밀리고 삶에 지친 서민들이 모여 살면서 거친 외세 의 바람막이가 되고 떠돌이 피난민들을 포근히 안아주었던 영주동 산복도로에 2011년부터 도시재생 프로젝트인 ‘산복도로 르네상스’사업이 시작되었다. 2018년에는 사람 냄새가 나는 ‘인문학당 달리’가 문을 열었다. ‘달리’는 ‘달을 담은 항아리’의 약자로서 ‘달리 보고 생각하여 새로운 세상을 찾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책 읽기, 강연, 북 콘서트, 음악 연주, 미술 전시회 등을 통해 주민들이 새로운 문화세상에 빠져들고 있다. 

부산역에서 용두산 부산타워, 감천문화마을, 168계단, 까 꼬막카페 등 산복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를 '먼디(언덕)버스'라고 한다. 부산 시내버스 43, 52, 86번을 타면 산복도로 구석구석을 찾아갈 수 있다. 고지대 주민과 외부 관광객을 위해 가파른 길에 요즘은 33도 경사의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지하철 1호선 부산역 7번 출구로 나와서 산복도로와 연결된 초량 이바구길로 들어서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기념관, 편지를 부치면 1년 만에 수취인에게 전달되는 유치환 우체통, 요절한 시인 김민부 전망대를 만나는가 하면, 가물가물한 오륙도를 비롯한 부산 시내를 한 눈에 내려 다 볼 수 있다. 골목마다 주민들의 옛날 생활을 담은 벽화가 있는가하면 초량초등학교 출신인 가수 나훈아, 코메디언 이경규, 음악인 박칼린 등 낯익은 얼굴들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인물사 담장’도 있다. 

산복도로 이바구길에 있는 조그만 사찰 소림사에는 ‘기억의 쉼터’가 있지만, 우리 기억에서 충혼의 흔적이 까마득 하게 사라지고 있다. 공산군의 6.25 남침 소식을 신문 호외로 접한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조국을 지키자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0년 9월 642명의 재일 학도의용군이 인천과 부산으로 들어와 군번도 없이 참전했다가 백마고지를 비롯한 여러 전선에서 135명이 전사하고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전쟁 중이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국권을 회복 한 일본은 당시 일본내 거주하던 조선인에게는 일본 국적을 주었지만, 참전으로 자리를 비운 학생들은 졸지에 외국인 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미군 부대에 소속된 의용군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나머지 200여 명은 초량의 소림사 법당에서 부산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일본행을 기다리다가 결국 뿔뿔이 흩어져 막노동에 나섰다. 정부는 1968년에야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이곳에 재일동포 출신 학도병을 기리는 쉼터를 마련했으나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고 있다. 

부산의 오지 중 오지인 범내골 안창마을은 1970년대 중반 에야 전기가 들어온 곳이다. 범내골은 냇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적이 드문 골짜기에 피난민들의 무허가 판자촌이 이 동네의 시작이다. 탈북 피난민이었던 통일교 교주 문선명도 이곳 공동묘지 근처서 토담집을 짓고 경전을 집필했으며 전도 활동도 안창마을부터 시작했다. 이곳은 통일교의 성지가 되어 외국 신도들이 찾아오며 기념관도 있다. 이곳 안창마을도 산복도로와 같은 르네상스 바람이 불어 예술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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