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야사[제13화] 대티이 柳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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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영리하지 않게 조금은 모자라게 사는 일이다.”

도봉산 자락의 어느 너저분한 택시회사 사장실에 꽤나 긴 이런 내리다지 현판 하나가 걸려 있는데 우리 동기생 유군(柳淳睦)이 이십여년전 그 택시회사를 설립할 때 평소에 갈고 닦은 휘호(揮毫) 솜씨를 발휘해서 사훈(社訓)으로 내걸었던 글귀란다. 그 바쁜 택시기사들이 어느 겨를에 그 깊고 오묘한 뜻을 음미할까마는 ‘대티이’ 치고는 그 힘찬 운필(運筆)도 그렇고 사뭇 의미심장한 내용이 아닐 수 없는데 표구를 할 때 유리덮개를 안해서 지금은 누렇게 퇴색을 했고 액자 테두리도 이제 너덜너덜 칠이 벗겨져 간다.

머리가 좀 모자라고 그래서 하는 짓마다 어쩐지 미련스럽고 굼뜨지만 그러나 결코 밉지 않는 친구를 우리 부산 머스마들은 ‘대티이’라고 부른다. 바보라는 뜻과 비슷하지만 ‘또디기’ 혹은 서울쪽에서 흘러들어온 ‘쪼다’라는 비어(卑語)가 있어서 구분이 되는데, 우리 동기생들 중에 그런 대티이 하나가 지금 B상운(商運)을 경영하고 있는 유군이다.

친구들이 얼마나 대티이라고 놀려댔으면 지금은 스스로도 ‘대티이 유’라고 그러겠는가. 언젠가 구미(歐美)의 운수업계를 시찰하기 위해 동업자들과 그쪽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는데 캐나다라든가 그쪽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마이 네임 이스 대티이 유” 그래 봤더니 상대방이 그쪽 말로 “대티이? 오, 굿! 한국사람 이름, 발음하기 아주 어려웠는데 유사장 이름, 우리 이름 같아서 기억하기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더란다.

그후로는 전화를 걸거나 동창회에 나오면 친구들한테 아주 내놓고 자신을 대티이 유라고 그러는데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깜빡 그 친구의 본명을 잊어버리고 동창명부를 찾아보고서야

“아하, 그래! 글마 원래 이름이 순목이다!” 그랬다.

대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유군은 별로 크지않은 키에 오동통하게 살이 쪘고, 평소에는 벙어린가 싶도록 말수가 적고 회사에서는 아침에 운전기사들의 출시(出市) 차비를 살피고는 오후 교대를 할 때까지 사장실 소파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오후 교대를 점검하고는 또 꾸벅꾸벅 졸고, 그러다가 저녁나절에 경리담당이 그날 입금을 보고하려고 들어오면 “됐다 그마. 기사들이 주는대로 받아 놓거라.”

그러고는 휭하니 퇴근을 해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기가 일순데 그러고도 서너대의 고물택시로 시작해서 아무리 이십년이 지났지만 지금은 백대가 넘게 불어난 걸 보면 신통방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언젠가 우리가 그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결은 무신 비결. 대인(大人)은 의인물용(疑人勿用)이요, 용인막의(用人莫疑)라 안켓나. 내가 머 그러키 큰사람은 앙이지마는 나도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를 않고 한번 쓰기로 한 사람은 절대 의심을 하지 않기로 했능기라. 그래야 신의(信義)고 머고가 생길 거 앙이가?”

그렇게 신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유군인지라 동창회도 빠짐없이 나와서 회식때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등에는 냄비같은 것을 쑤셔넣고 병신춤을 추어서 친구들을 요절복통하게 만드는데 그때마다 레퍼터리가 갖가지 병신모습으로 바뀐다든지 짐짓 바보스레 ‘이 화기애매(화기애애) 한 자리에, 오랜만에 핸들을 놓은 기사 여러분을 모시고…’ 하는 따위의 재치 있는 유머감각을 보면 대티이가 머리가 좀 모자란다는 건 아무래도 그 친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고 딱한 처지의 친구나 이웃을 보면 재빠르게 소매를 걷어부치는걸 보면 행동이 미련스럽고 굼뜨다는 것도 말이 아닌 듯 싶다.

작년 가을에 우리 동창 M군의 아내가 하찮은 시비로 이웃집 아낙네와 대판싸움을 벌여서 그만 징역을 살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 M군은 그 재판 결과가 너무 억울하다고 친구들한테 변호사를 사고 어쩐다면서 항소비용(抗訴費用)을 빌리러 다녔었는데 말이 빌리는 거지 밑구멍이 째지는 그의 형편에 구걸이나 다름없었고 평소 친구들과 금전관계를 위시해서 모든 신용이 엉망이었던 탓에 몇푼 걷지도 못하고 손도 못써볼 지경에 이르러서야 대티이 유를 찾아갔다는데 마지막으로 유군을 떠올린 것은 그럴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 이년쯤 전이라든가. M군이 사글세에서 전세집으로 옮긴다고 유군한테 석 달을 약속하고 기백만원을 빌려갔었는데 그후 예의 그 못된 버릇대로 꿩 구어먹은 자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M군은 빈 손으로 내쫓기더라도 옛날 일이나 백배사죄를 할 참이었다는데 대티이 유는 M군을 만나자마자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이렇게 숨가쁘게 고함을 치더라는 것이다.

“미친 놈의 자슥! 어데를 싸돌아댕기다가 인자사 오노? 친구들한테서 이바구 들었다. 늘그막에 마누라 가막소(교도소)에 여넣고 우째 살라카노? 그래, 변호사 사고 어짤라카믄 몽땅 얼매나 든다꼬?”

그날 M군은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보다 더욱 소리내어 울었고 지금은 유군의 택시회사에서 총무부장으로 일하면서 이제는 더없이 착실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저께였다. 이번 따라 어째 술술 구상이 잘 풀린 덕에 연말특집원고를 일찌감치 끝내서 PD한테 넘겨주고 드디어 야외촬영도 떠났던 참이라 무슨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 없나 무료하기 짝이 없었는데 대티이 유한테서 전화가 왔다. 신문기사를 봤다면서 급히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신문기사는 뭐고 택시회사하고 글쟁이 사이에 무슨 그런 급한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약속장소인 강남의 일식집으로 나갔더니 그는 덥썩 나의 두손을 잡으면서 이러는 것이었다.


“신문에서 봤다. 니가 이번에 정신대 후원회원(挺身隊 後援會員)이 됐다믄서?”

“응, 그거… 명단에 옇겠다 케서 나쁜 일도 앙이고 머 그라라 켓다.”

“미친 놈의 자슥! 나뿐 일이라이? 백 년이 걸리더라도 그놈들 만행은 대명천지에 밝혀져야 하고 더구나 그 여자들이 누구고? 바로 우리 엄마들이고 누부야(누나)들 앙이가? 안그렇나?” 벌건 초저녁 부터 마구 침을 튀기기 시작하길래 이러다 술상 뒤집겠다 싶어 나는 가운데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 일 때문에 급히 만나자켓나?”

“하모. 그런데 후원금이 잘 안걷힌다믄서?”

“그런 모양이더라. 나도 쪼매 내놓으라케서 어제 간신히 이십만원 냈다.”

“지랄한다. 술 좀 대강 쳐묵고 그럴 때 좀 왕창 내놓지.”

디립다 눈을 흘기더니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술상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그 이십만원에다가 추가로 더 내거라. 내 이름은 입도 벙긋하지 말고 늬 이름으로 말이다. 알겄제?”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면서 건네주었던 돈은 정확하게 그날 택시기사들로부터 입금된 백원짜리 동전까지 몽땅이었다. 그날 밤 우리 두 사람은 삼 차까지 코가 비뚜러지도록 퍼마셨고 그날 대티이 유 가 몇번이나 지꺼리던 소리를 나는 아마 죽어 황천에 가서도 못잊을 것이다.

“대티이 매로 좀 모자라게 사는기라! 얼매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은 세상이고! 자나깨나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그렇키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내 겉은 대티이가 쪼매 있다꼬 머 어떻켓노?”

그래, 맞다. 인생은 영리하지 않게 조금은 모자라게 사는 일이다. 내일은 대티이 유의 사무실에 가서 휘호에 유리도 끼어주고 액자 테두리도 멋진 오동나무로 갈아줘야겠다.   <5월 호에 계속~>


최경식(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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