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에서 생긴 일 - 흑모 백모 이야기
유년기나 꿈 많은 사춘기를 부산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해운대는 잊지 못할 추억의 바다이다. 초량 앞바다가 아침의 바다라면 해운대 앞바다는 저녁의 바다이다. 초량의 모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던 바다가 멀리 떠날 출항의 바다였다면 해운대의 바다는 언제나 머리맡에서 출렁이는 귀 간지러운 귀항의 바다이다.
부고생이면 누구나 등교길에 비치던 눈부신 태양과 그 태양을 역광으로 받아 검푸르게 출렁이던 청조의 아침바다를 잊지 못한다. 동시에 길게 드러누운 흰 모래벌과 둥근 수평선, 동백섬을 넘어온 금빛 찬란한 낙조의 해운대 저녁바다를 잊지 못할 것이다. 졸업 후 어디를 가도 늘 가슴에 출렁이는 바다, 부고인에게 바다는 모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정서의 고향이다. 그 바다를 수 십 년 떠나 살게 된 사람들이 어쩌다 부산에 가게 되면 모교에는 못 가도 해운대는 찾아가는 예가 많다고 한다. 딱히 볼일이 없어도 말이다.
잊지못할 추억의 바다 ‘해운대’
해운대는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이라도 털면 추억의 먼지가 나올 법한 곳이다. 여기, 부산서 나서, 부고를 나와, 부산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는 젊은 날, 괜히 고독한 척 코트 깃을 세우고 바닷가를 거닐거나 센치한 표정으로 동백섬 갯바위에 앉아 먼 수평선을 바라보곤 하였다. 혹시 누군가에게 그 멋진 모습이 발각이 되어 말을 걸게 되거나 운 좋게 여학생이라도 걸리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망상과 함께 언제까지 앉아 있어도 누구하나 걸려들지 않아 쓸쓸히 돌아가곤 했던 적도 있었다. 가다가 정 섭섭하면 길가 영어 간판의 다방에 들어가 차 한잔을 시켜놓고 이유 없는 고민을 하다가 돌아오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하여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를 자주 데려와 사랑이 어떠니 낭만이 어떠니 하고 '구라'를 까면서 동백섬을 거닐기도 하였다. 그 때는 (지금은 동백이 많이 심어져 있지만) 동백꽃 하나 없던 동백섬을 얼마나 아쉬워하였던가. 솔숲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푸르고 깊은 바다의 하반신을 보면서 그녀의 가슴언저리에 와 닿는 수평선에 얼마나 가슴 울렁거렸던가. 그 때는 지금 같은 호텔이나 편의시설이 없었어도 자연 그대로의 정취가 더 없이 좋았다. 애를 낳아 첫바다를 보여준 곳도 해운대였고, 함부로 공개 못할 사람과 은밀히 백사장을 거닐거나 생의 기로에서 ‘해운대 엘레지’를 부르며 실의의 소주를 마시곤 했던 해운대! 실로 그에게 해운대는 추억과 회상의 데이터베이스였다.
세월은 모질게 흘러 그는 지금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사우나탕에 앉아 있다. 어느 덧 반백이 된 그의 모습은 언제나 푸르 청청하고 기세등등한 저 바다와 대비된다. 그 시절 으르렁거리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말수는 적어지고 말귀도 멀고 눈알만 돌아간다. 젊은 날, 그는 이 바다가 개발되면서 온갖 인공물로 오염되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 신부가 강간 당하는 것 같이 분개하였지만, 지금은 무덤덤 그저 그러려니 할뿐이다. 오늘날 해안을 빙 둘러선 고층 리조트 건물들은 해운대를 편리하게 해주고는 있지만 그의 기억의 독도법으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그는 잘나가던 직장에서 얼떨결에 잘려 나왔다. 그 후 그는 당적 없는 야당이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노는 것도 아니고 아니 노는 것도 아닌 현대판 김삿갓이 되었다.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피치 못할 애경사에만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간다. 그날도 그는 친척의 장례식에 왔다가 그냥 상경하지 못하고 옛날 생각이 나서 해운대로 간 것이다. 간 김에 지친 몸을 쉬려고 (정확하게는 갈 데가 없어서) 그는 사우나탕을 찾았다. 해운대의 바다는 온통 콘도나 호텔에 포위 당해 있었다. 유리창만 없으면 그대로 바닷속인 사우나탕, 그는 본의 아니게 호화판 로마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팔뚝에는 큐피드의 화살을 당길 힘줄이 남아 있고, 아랫도리는 아직 짱짱하다. 그런데, 이 밝은 날, 할 일이 없어 끓는 물 속에 앉아 끓는 심사를 이열치열로 식히려 한다.
물끄러미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그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간 것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많은 것이 떠나갔고 그 많은 것을 삼킨 저 수평선은 변함없이 그때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그 당당함이 얄미울 정도다. 그는 탕에서 몸을 일으켜 수건으로 살을 민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인 듯이… 밀다가 언뜻 하얗게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웬 머리털이 이리 자주 빠지나 하면서 걷어내려 했으나 쉬 떨어지지 않는다. 아,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머리에서 떨어진 silver thread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흑모와 백모의 격론… 끝내 무승부
그는 고교 때 준이, 욱이, 원이, 수야 등과 같이 무슨 일로 동래 온천장에서 목욕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모두들 한창 때라 각자의 남성들이 발전되고 있었고 그 주변이 어른들처럼 검은 숲이 무성하였다. 상태도 포장과 비포장이 반반쯤 되어 화제가 만발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그 부위도 머리카락처럼, 수염처럼 하얗게 센다는 놈과 그 부위는 다른 것과 달라서 나이가 들어도 안 센다는 놈, 즉 흑모와 백모 두 파로 갈라졌다. 그는 흑모파에 속했는데 결론이 나지 않자 실물확인을 위해 목욕탕 안에 들어 온 노인네를 찾아보았으나 마침 없었다.
할 수 없이 정답을 가진 노인네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마침 백발이 듬성듬성한 노인네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목욕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엉거주춤 들어서서는 절대로 앞을 안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인과 아이들간에 눈에 안 보이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보려고(?) 눈을 번득거리고 어떤 놈은 어르신네 가까이 가서 그 신물을 보려고 기웃거리는데 몇 번을 요리조리 피하던 노인네가 그 고의성 있는 불량기를 알아차리고, “요놈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어른도 모르고 어데서 자꾸 볼라캐쌓노?” 하면서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쫓겨 나와 무승부가 되었다. 그 후로 만나면 서로가 목욕탕에서 따로따로 확인하였노라고 하면서 제 주장이 옳다고 우겼으나, 공부하느라 바빠 합동 현장검증을 하지 못한 채 졸업 후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인체의 모든 부분은 세월가면 노화하기 마련인데 그 부분이라고 무사할 리 있겠는가. 다만, 그 단순하고 당연한 생리를 젊은 혈기에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청춘의 피가 끓던 시절에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저만 혼자 안 죽고 피해나갈 자신이 있다고 믿는 무모한 기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바다가 보이는 사우나탕 안에서 보는 눈앞의 수평선은 조금의 변함도 없이 젊은 시절 그 때 그대로 턱 버티고 있고 바닷물은 똑같이 출렁거리는데 그렇게도 믿지 않았던 백발이 아니 白毛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의 골짜기에 나타났으니 이제는 수 십 년 전 아니라고 우겼던 사실을 인정치 않으래야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누구든 생로병사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인생은 잠깐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IMF를 겪은 이후 연공서열이 무너지고 능력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이 말은 그가 젊었을 때 목구지 따갑게 외치던 구호인데 그것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지금의 오십대는 정치판의 3김이 사십대 기수론을 내세우고도 70이 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을 익히 보아 온 터다. 그들도 그들처럼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운 나쁘게 세상이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 누구 누구만 빼놓고…
사십대 CEO, 사십대 은행장, 삼십대 지점장의 시대에 50년생 전후 출생 세대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설령 머리가 세지 않고 X 털이 세지 않는다 하여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회가 너무 빨리 열리고 너무 빨리 닫힌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인생다운 것인데 일이 없는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생의 원숙기인 오십대에 일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비극이자 나라의 비극이다. 진정한 능력의 시대란 능률의 시대를 말함이요, 능률은 일률적으로 나이로 가름되지 않는다. 능률은 나이와 상관없이 고른 연령층에서 각자의 기능을 다할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오십대 이상뿐만 아니라, 갓 대학을 졸업한 이십대에게도 일자리가 별로 없는 참혹한 시대이다. 어찌 보면 가장 비능률적인 사회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그 때 黑毛, 白毛를 주장했던 놈들은 이제 다 어찌 되었을까. 아직도 털 색깔이 변치 않아 현역에 남아 있는 놈은 희귀종이라 해야할까.
<6월 호에 계속~>
故 박구하(18회)
해운대에서 생긴 일 - 흑모 백모 이야기
유년기나 꿈 많은 사춘기를 부산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해운대는 잊지 못할 추억의 바다이다. 초량 앞바다가 아침의 바다라면 해운대 앞바다는 저녁의 바다이다. 초량의 모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던 바다가 멀리 떠날 출항의 바다였다면 해운대의 바다는 언제나 머리맡에서 출렁이는 귀 간지러운 귀항의 바다이다.
부고생이면 누구나 등교길에 비치던 눈부신 태양과 그 태양을 역광으로 받아 검푸르게 출렁이던 청조의 아침바다를 잊지 못한다. 동시에 길게 드러누운 흰 모래벌과 둥근 수평선, 동백섬을 넘어온 금빛 찬란한 낙조의 해운대 저녁바다를 잊지 못할 것이다. 졸업 후 어디를 가도 늘 가슴에 출렁이는 바다, 부고인에게 바다는 모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정서의 고향이다. 그 바다를 수 십 년 떠나 살게 된 사람들이 어쩌다 부산에 가게 되면 모교에는 못 가도 해운대는 찾아가는 예가 많다고 한다. 딱히 볼일이 없어도 말이다.
잊지못할 추억의 바다 ‘해운대’
해운대는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이라도 털면 추억의 먼지가 나올 법한 곳이다. 여기, 부산서 나서, 부고를 나와, 부산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는 젊은 날, 괜히 고독한 척 코트 깃을 세우고 바닷가를 거닐거나 센치한 표정으로 동백섬 갯바위에 앉아 먼 수평선을 바라보곤 하였다. 혹시 누군가에게 그 멋진 모습이 발각이 되어 말을 걸게 되거나 운 좋게 여학생이라도 걸리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망상과 함께 언제까지 앉아 있어도 누구하나 걸려들지 않아 쓸쓸히 돌아가곤 했던 적도 있었다. 가다가 정 섭섭하면 길가 영어 간판의 다방에 들어가 차 한잔을 시켜놓고 이유 없는 고민을 하다가 돌아오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하여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를 자주 데려와 사랑이 어떠니 낭만이 어떠니 하고 '구라'를 까면서 동백섬을 거닐기도 하였다. 그 때는 (지금은 동백이 많이 심어져 있지만) 동백꽃 하나 없던 동백섬을 얼마나 아쉬워하였던가. 솔숲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푸르고 깊은 바다의 하반신을 보면서 그녀의 가슴언저리에 와 닿는 수평선에 얼마나 가슴 울렁거렸던가. 그 때는 지금 같은 호텔이나 편의시설이 없었어도 자연 그대로의 정취가 더 없이 좋았다. 애를 낳아 첫바다를 보여준 곳도 해운대였고, 함부로 공개 못할 사람과 은밀히 백사장을 거닐거나 생의 기로에서 ‘해운대 엘레지’를 부르며 실의의 소주를 마시곤 했던 해운대! 실로 그에게 해운대는 추억과 회상의 데이터베이스였다.
세월은 모질게 흘러 그는 지금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사우나탕에 앉아 있다. 어느 덧 반백이 된 그의 모습은 언제나 푸르 청청하고 기세등등한 저 바다와 대비된다. 그 시절 으르렁거리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말수는 적어지고 말귀도 멀고 눈알만 돌아간다. 젊은 날, 그는 이 바다가 개발되면서 온갖 인공물로 오염되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 신부가 강간 당하는 것 같이 분개하였지만, 지금은 무덤덤 그저 그러려니 할뿐이다. 오늘날 해안을 빙 둘러선 고층 리조트 건물들은 해운대를 편리하게 해주고는 있지만 그의 기억의 독도법으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그는 잘나가던 직장에서 얼떨결에 잘려 나왔다. 그 후 그는 당적 없는 야당이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노는 것도 아니고 아니 노는 것도 아닌 현대판 김삿갓이 되었다.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피치 못할 애경사에만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간다. 그날도 그는 친척의 장례식에 왔다가 그냥 상경하지 못하고 옛날 생각이 나서 해운대로 간 것이다. 간 김에 지친 몸을 쉬려고 (정확하게는 갈 데가 없어서) 그는 사우나탕을 찾았다. 해운대의 바다는 온통 콘도나 호텔에 포위 당해 있었다. 유리창만 없으면 그대로 바닷속인 사우나탕, 그는 본의 아니게 호화판 로마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팔뚝에는 큐피드의 화살을 당길 힘줄이 남아 있고, 아랫도리는 아직 짱짱하다. 그런데, 이 밝은 날, 할 일이 없어 끓는 물 속에 앉아 끓는 심사를 이열치열로 식히려 한다.
물끄러미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그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간 것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많은 것이 떠나갔고 그 많은 것을 삼킨 저 수평선은 변함없이 그때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그 당당함이 얄미울 정도다. 그는 탕에서 몸을 일으켜 수건으로 살을 민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인 듯이… 밀다가 언뜻 하얗게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웬 머리털이 이리 자주 빠지나 하면서 걷어내려 했으나 쉬 떨어지지 않는다. 아,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머리에서 떨어진 silver thread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이었단 말인가?
흑모와 백모의 격론… 끝내 무승부
그는 고교 때 준이, 욱이, 원이, 수야 등과 같이 무슨 일로 동래 온천장에서 목욕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모두들 한창 때라 각자의 남성들이 발전되고 있었고 그 주변이 어른들처럼 검은 숲이 무성하였다. 상태도 포장과 비포장이 반반쯤 되어 화제가 만발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그 부위도 머리카락처럼, 수염처럼 하얗게 센다는 놈과 그 부위는 다른 것과 달라서 나이가 들어도 안 센다는 놈, 즉 흑모와 백모 두 파로 갈라졌다. 그는 흑모파에 속했는데 결론이 나지 않자 실물확인을 위해 목욕탕 안에 들어 온 노인네를 찾아보았으나 마침 없었다.
할 수 없이 정답을 가진 노인네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마침 백발이 듬성듬성한 노인네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목욕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엉거주춤 들어서서는 절대로 앞을 안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인과 아이들간에 눈에 안 보이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보려고(?) 눈을 번득거리고 어떤 놈은 어르신네 가까이 가서 그 신물을 보려고 기웃거리는데 몇 번을 요리조리 피하던 노인네가 그 고의성 있는 불량기를 알아차리고, “요놈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어른도 모르고 어데서 자꾸 볼라캐쌓노?” 하면서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쫓겨 나와 무승부가 되었다. 그 후로 만나면 서로가 목욕탕에서 따로따로 확인하였노라고 하면서 제 주장이 옳다고 우겼으나, 공부하느라 바빠 합동 현장검증을 하지 못한 채 졸업 후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인체의 모든 부분은 세월가면 노화하기 마련인데 그 부분이라고 무사할 리 있겠는가. 다만, 그 단순하고 당연한 생리를 젊은 혈기에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청춘의 피가 끓던 시절에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저만 혼자 안 죽고 피해나갈 자신이 있다고 믿는 무모한 기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바다가 보이는 사우나탕 안에서 보는 눈앞의 수평선은 조금의 변함도 없이 젊은 시절 그 때 그대로 턱 버티고 있고 바닷물은 똑같이 출렁거리는데 그렇게도 믿지 않았던 백발이 아니 白毛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의 골짜기에 나타났으니 이제는 수 십 년 전 아니라고 우겼던 사실을 인정치 않으래야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누구든 생로병사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인생은 잠깐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IMF를 겪은 이후 연공서열이 무너지고 능력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이 말은 그가 젊었을 때 목구지 따갑게 외치던 구호인데 그것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지금의 오십대는 정치판의 3김이 사십대 기수론을 내세우고도 70이 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을 익히 보아 온 터다. 그들도 그들처럼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운 나쁘게 세상이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 누구 누구만 빼놓고…
사십대 CEO, 사십대 은행장, 삼십대 지점장의 시대에 50년생 전후 출생 세대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설령 머리가 세지 않고 X 털이 세지 않는다 하여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회가 너무 빨리 열리고 너무 빨리 닫힌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인생다운 것인데 일이 없는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생의 원숙기인 오십대에 일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비극이자 나라의 비극이다. 진정한 능력의 시대란 능률의 시대를 말함이요, 능률은 일률적으로 나이로 가름되지 않는다. 능률은 나이와 상관없이 고른 연령층에서 각자의 기능을 다할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오십대 이상뿐만 아니라, 갓 대학을 졸업한 이십대에게도 일자리가 별로 없는 참혹한 시대이다. 어찌 보면 가장 비능률적인 사회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그 때 黑毛, 白毛를 주장했던 놈들은 이제 다 어찌 되었을까. 아직도 털 색깔이 변치 않아 현역에 남아 있는 놈은 희귀종이라 해야할까.
<6월 호에 계속~>
故 박구하(18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