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야사[제14화] 朴물건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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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 참 물건이대이 

담대한 친구, 그래서 남이 안하는 짓을 하는 친구, 괴짜, 지독한 장난꾸러기, 그런 친구들을 통털어서 우리는 ‘물건’이라고 한다. 인간이 아닌 무슨 물건을 대하는 것처럼 거북살스럽다는 뜻도 있고 그래서 평범하게 대하기가 어렵다는 경외(敬畏)의 뜻도 담겨 있다. 그래서 “글마 참 물건이대이·…”하게 되면 칭찬까지는 몰라도 결코 욕은 아니다.

신인소설가 박성환(朴星桓)도 고교시절부터 그런 물건 축에 든다. 그러나 다른 잡스러운(?) 물건들과는 달라서 오전 체육시간에 남의 도시락을 몰래 까먹고 칠판지우개 따위를 넣어 놓는다든지, 교실 문설주 위에 물깡통을 올려놓았다가 등교하는 급우들한테 물벼락을 맞게 하는 그런 시시껄렁한 장난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물건치고는 고교시절부터도 좀 묵직하고 고급품인 셈이었다.

입학을 하고 두어달 밖에 안돼서 양호실의 설흔이 다 된 여선생한테 장문의 연애편지를 보냈던 사건도 지금 생각하면 주위사람들이 그의 천진난만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분명히 그런 유치한 장난은 아니었다. 자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양호선생은 지금의 남편과 이혼을 하고 자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자고, 그것도 말미에 ‘1학년 4반 박성환 올림’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서 한달 동안이나 유기정학을 당했던 어처구니 없었던 사건을 동기생들은 지금 생각을 해도 아마 배꼽 근처가 간지러울 것이다. 정학처분을 받던 날, 깡패두목같았던 훈육주임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치껴들고 이렇게 대들었던 그 친구도 어느듯 올해 설흔 아홉살이 되었다.

“우리 P고교 추천도서 중에 독일문호 괴테가 있다는 것, 선생님도 아시지예? 그 사람 일대기(一代記)를 읽어보이까 그 양반이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나이도 없다 카믄서 칠십이 넘어 갖고도 오십살도 더 에린(어린) 열여덟살 묵은 처이(처녀)하고 연애를 했대예. 그런데 나는 열두살 밖에 안 많은 여자하테 구혼을 했다 그 말입니다. 참말로 사랑합니더. 머리에 털나고 그러키 이뿐 여자는 처음 봤고예, 양호실에서 우리를 보살피주는 정성을 보면 참말로 천사 겉은 여자가 따로 없습디더. 그런 여자한테 장개 좀 가겠다는데 잘몬한 거는 머고 정학은 또 멉니꺼?”

그러면서 분을 못삭여서 눈물을 펑펑 쏟던, 암튼 그렇게 맹랑하고 대단히 조숙했던 친구는 분명했다. 그는 졸업할 무렵에서야 정모씨였던 그 양호선생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는데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할 줄 알았던 그 여선생은 뜻밖에도 다정하게 웃으며 이러는 것이었다.

“앙이다. 용서는 무신 용서. 인자사 이바구지 나도 그러키 기분 나쁘지는 않더라. 세상 여자 치고 이뿌고 천사겉다 카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노? 더구나 고등학생치고 박성환이 매로 주관이 뚜렷하고 문장력이 좋은 학생은 내 처음 봤능기라. 참말로 우짜믄 그러키 편지를 잘 썼노? 구절 구절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다 나오더라. 훈육주임한테 찔러서 미안하대이. 후제 성환이는 내보다 천배만배 더 좋은 색씨 얻어서 기가 맥히게 잘 살끼다. 두고봐라.”

그건 용서가 아니라 모교 은사만 아니면 수째 연하의 남자를 유혹하는 그런 소리 같았다. 암튼 그런 물건이었지만 그는 평소에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고 공부도 삼년 내리 상위권이어서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담임은 평소의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품성을 고려해서 S대 철학과를 권했는데 그는 또 한번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해서 담임은 물론 부모와 친구들의 입을 따악 벌어지게 만들었다. 아예 전기 시험은 보지도 않고 후기 대학인 G대 문예창작과를 가겠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렇게도 게걸스럽게 소설을 읽어 대기도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 고집을 부려서 G대 문창과를 과 수석으로 들어갔는데 그 와중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으면 그때 자기 아버지가 이랬겠는가.

“수석이고 비석이고 한해 쉬면서 생각 고치묵고 내년에 다른 대학에 가든 안되겄나?”

암튼 그의 괴벽과 똥고집으로 미루어 주위 사람들은 그가 대학 재학 중에 틀림없이 불세출의 명작 소설을 쓰리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설흔이 넘을 때까지도 명작은 커녕 그는 한 줄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일간지 신춘문예에 입선(入選) 정도로는 이름이 비칠줄 알았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글 줄 하나 쓰지 않는 것이었다. 안쓰는 게 아니라 못쓰는 게 아닌가 싶어 동기생들이 언젠가 조심스레 물어봤는데 그의 대답은 여전히 물건답게 이랬다.

“그래. 못쓰기도 하고 안쓰는 기다. 글이라꼬 그냥 쓰기만 하믄 다 글인 줄 아나? 인생을 알아야지, 인생을.”


꼬시기는? 그마 내 큰 딸을 주기로 안했나. 

그 인생을 언제쯤 알려는지 동기생들은 모두 장가를 가서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 그는 설흔 다섯의 나이에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역시 물건답게 상대가 자기보다 열세살이나 어린 스물 두살의 기막힌 미인이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취직은 커녕 신문 배달도 한번 안해봤던 그가 무슨 수단으로 그런 앳된 처녀를 꼬셨는지 모두 궁금하기 짝이 없었고, 결혼을 앞두고 그 미인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동기생들은 그녀가 아무래도 어디선가 대단히 낯익은 얼굴 같다는 생각들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년 늦가을의 결혼식장에서 신부측의 부모석(父母席)을 본 동기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옛날의 양호실 여선생이 혼자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남편을 여의고 종합병원의 수간호사가 된 그 정선생은 피로연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꼬시기는? 재작년 겨울에 우연하이 길에서 만났더이 이거는 거지 중에도 상거진기라. 아무래도 이 사람이 내 땀시 이래 됐구나 싶어서 그마 내 큰 딸을 주기로 안했나.”

그는 신림동 산비탈에 사글세 단칸방을 얻어서 신접 살림을 차렸는데 밥그릇 두 개, 숟가락 두 개, 밥상이자 책상, 그런 식의 세간살이였지만 그제서야 인생이란 걸 알았는지 드디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끔 어린 새색씨가 우리는 언제 전세집을 거쳐서 우리집이란 걸 가져 보느냐고 바가지 겸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평소의 그답게 방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눈 아래의 질펀한 서울시내를 가리키며 늘쩡하게 이러는 것이었다.

“봐라. 하우스(house)는 천지빼까리다. 그렇지마는 저속에 홈(home)은 도대체 몇이나 되겠노? 집이 앙이라 가정이 중요하다 그 말인기라. 당신은 다른 여자들 매로 하우스 키파(house keeper)가 되지 말고 여게서 마, 홈키파(home keeper) 연습이나 탄탄하게 해놓거라.”

거기서 그는 「사람의 사랑」이라는, 제목만 봐서는 우습지도 않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는데 출간한 지 반 년도 안돼서 무려 15만권이나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지난 봄에 전세도 거치지 않고 강남에 대형 맨션을 장만했다. 그러나 지난 시월, 졸업 20주년 행사에 참가한 그는 너도나도 축하 인사를 퍼붓는 동기생들한테 아직도 우거지상을 하고 이렇게 투덜거리더란다.

“쪼매 더 있다가 글을 쓰는긴데… 허이구, 그기 무신 소설이고? 마흔살도 안 된 얼라가, 지가 무신 인생을 안다꼬. 참말로 물건이라는 내 별명이 부끄럽대이.”     

<6월 호에 계속~>


故 최경식(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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